▽사퇴 안팎〓이 고문은 16일 밤 사퇴 결심을 굳혔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다. 그는 경기 지역 지구당을 순회 방문한 뒤 이날 저녁 원유철(元裕哲) 의원으로부터 경기지역 판세를 전해 듣고 핵심 참모들로부터 사퇴 건의를 받았다는 후문이다.
17일 오전 이 후보가 김기재(金杞載) 의원 등 6명의 측근 의원과 김충근(金忠根) 정무특보가 참석한 자리에서 “더 이상의 경선은 무의미한 것 같다”며 스스로 사퇴 얘기를 꺼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선 끝까지 경선을 치른 뒤 패배를 인정해야 ‘경선 불복’이라는 원죄를 씻을 수 있다는 의견도 일부 제기됐으나 이 후보는 “탈당하는 것도 아니고 신당을 만들겠다는 것도 아닌데…. 미국에서도 중도에 사퇴하지 않느냐”며 결심을 밝혔다고 한 측근 의원은 전했다.
이 고문의 중도 사퇴 결심에는 노무현(盧武鉉) 후보와의 격차(1512표) 확대, 정치적 기반인 경기지역 경선에서 패배할 가능성, 캠프의 자금난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정치적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판단도 사퇴 결심에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한 측근 의원은 이 고문 측이 ‘음모’의 진원지로 지목해 온 박지원(朴智元) 대통령비서실장의 임명도 외부요인 중 하나라고 전했다.
▽향후 행보〓이 고문은 향후 거취에 대해 “당의 발전과 중도개혁노선의 승리를 위해 백의종군의 자세로 헌신하겠다”고만 말했다. 전용학(田溶鶴) 의원은 경선 승복 여부를 묻는 질문에 “질문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탈당이나 외유 계획도 없다는 게 측근들의 얘기다.
한 측근은 “대선 때까지 8개월의 기간이 남았고 정국의 격동적 변화가 예상되는 만큼 일단 정국 상황을 지켜보면서 기회를 기다릴 것이다”고 전했다.
그의 행보를 짐작케 하는 또 다른 단서는 그동안 “노 후보가 정계개편을 추진하면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고 여러 차례 밝혀왔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일부 측근들은 노 후보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정계개편을 추진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정치판 질서 자체가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을 이 후보가 하고 있다고 전한다.
따라서 ‘중도개혁 정당’이란 기치를 들고 독자노선을 모색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게 이 고문 진영 일각의 기대다. 그러나 이 고문이 이미 정국을 주도할 위치에서 멀어진 만큼 당분간은 ‘정치적 칩거’를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