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一. 젊은 자객(4)

  • 입력 2002년 4월 18일 15시 00분


젊은 자객(4)

쇠몽둥이를 둘러멘 자객이 문득 시황제가 타고 있는 온량거 쪽을 노려보며 다시 소리쳤다.

“여정, 이 성(姓) 셋 가진 놈아. 네 어디 숨었느냐? 어서 나와 이 철퇴를 받아라!”

하지만 장한 것은 그 같은 기세뿐이었다. 맹렬한 그의 반격에 잠시 멈칫했던 시위 갑사들이 다시 그를 에워싸고 머지않은 곳에서 기병(騎兵)들까지 달려와 가세하자 자객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병기 부딪는 소리 사이로 비명과 신음소리만 들리더니 이윽고 모든 게 조용해졌다. 그러나 시황제는 불타는 듯한 자객의 눈동자가 아직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치를 떨었다.

“폐하, 송구하옵니다. 불궤(不軌)를 도모한 자가 있어 잠시 어전이 소란하였습니다.”

오래잖아 기장(騎將)하나가 달려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아뢰었다. 시황제는 얼른 마음을 가다듬었다. 황제는 놀라서는 안 된다. 아니, 놀랄 수 없다.

“잡았느냐?”

상대가 자신의 희로(喜怒)를 쉬 짐작할 수 없게 나직하고도 무심한 목소리로 시황제가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하오나 이미 목숨이 붙어있질 않습니다. 보시겠사옵니까?”

그렇다. 어서 끌고 오너라-시황제는 하마터면 그렇게 대답할 뻔했다. 감히 황제인 나를 저격하려 하다니. 하지만 시황제는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짐(朕)은 조짐(兆朕)이다. 함부로 가볍게 드러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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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는 한낱 흉기(凶器)에 지나지 않는다. 반드시 뒤에서 시키고 부추긴 자가 따로 있을 것이다. 주변을 뒤져 보았느냐?”

“황송하옵니다. 창황(蒼黃)하여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지금 곧 기병을 풀겠습니다.”

그 기장이 한층 더 움츠러든 어조로 그렇게 받고는 도망치듯 말머리를 돌리려 했다.

“그만 두어라. 설령 동모(同謀)가 근처에 있었다 한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기야 하겠느냐?”

시황제가 여전히 희로를 짐작할 수 없는 어조로 그렇게 말려 놓고 조용히 덧붙였다.

“부근에서 가장 큰 성읍이 어디냐?”

“신정(新鄭)일 듯 하옵니다.”

“그리로 가자. 짐의 행차를 신정으로 이끌라.”

시황제는 그 말과 함께 온량거의 창을 닫았다. 신정으로 가는 까닭은 자신의 내심에만 담아 두었다.

(저들이 여기서 나를 치기로 하였으면 반드시 그곳에서 마지막 채비를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곳 성문에 저 자의 시체를 걸어놓고 널리 물으면 반드시 저 자를 알아보는 자가 있을 것이다. 저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자에게는 천금을 상으로 내리고, 알면서도 숨기는 자는 삼족(三族)을 모두 죽이리라. 그렇게 하여 먼저 저 자를 아는 자부터 찾아내면 저 자를 부린 흉수(兇手)도 잡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시황제는 온량거 안의 와상(臥床)에 걸터앉으며 그동안 풀어두었던 장검을 다시 허리에 찼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바깥에서의 느낌은 태산 같은 무게와 고요함일 것이나, 시황제의 가슴 속에는 이미 음험한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직도 짐은 칼을 풀어놓고 쉬지 못한단 말이냐, 아직도 감히 짐을 노리는 쥐 같은 무리가 있다는 말이냐-치솟는 울화를 삭이지 못한 시황제가 천천히 장검을 뽑아들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잘 벼려진 보검의 시퍼런 칼날이 문득 오래 잊고 있었던 옛일을 떠오르게 했다. 9년 전 연(燕)나라 태자 단(丹)이 자객 형가(荊軻)를 보낸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일의 빌미가 된 단의 원망부터가 어이없고도 분통터지는 노릇이었다. 연나라가 단을 진나라 수도 함양에 인질로 보내온 것은 시황제가 열 셋의 나이로 진왕(秦王)이 된 지 열 다섯 해 뒤였다. 그 무렵 시황제는 마침내 상국 여불위(呂不韋)를 내몰고 한창 군주의 위엄을 세워나가고 있었다. 그런 시황제 앞에 갑자기 나타난 단은 한동안 난감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단은 예전 조(趙)나라에서 인질로 있을 때 시황제와 서로 친하였다 하나 시황제로서는 하도 어렸을 적 일이라 단의 얼굴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다. 부왕(父王) 장양왕(莊襄王)이 한때 조나라에 인질로 있었던 적이 있고, 시황제는 그때 한단(邯鄲)에서 태어났으나 누구와 사귈 만한 나이가 되기 전에 한단을 떠났다. 아마도 어린 날의 시황제와 친했다는 단의 기억은 같이 인질로 있던 부왕을 먼 빛으로 보며 느꼈던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이 머리 속에 잘못 남은 것인 듯했다.

그런데도 단은 그 잘못된 기억에 의지해 한낱 인질로 끌려온 주제에 시황제를 오랜만에 만나는 옛 벗 대하듯 하니 그 앞에서는 도무지 군주의 영이 서지 않았다. 거기다가 두 번씩이나 남의 나라에 인질로 끌려다니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그 미욱함이나 태평스러움도 시황제에게는 밉살맞기 그지없었다. 이에 몇 번인가 허약한 이웃나라에서 끌려온 인질로서 강대한 종주국의 군주를 대하는 예절을 엄하게 가르쳤더니, 그만 계집같은 앙심을 품게 된 듯했다. 어느 날 밤 저희 나라로 몰래 도망치고 말았다.

진의 법도대로라면 마땅히 대군을 일으켜 연나라를 치고 그 불신(不信)의 죄를 물어야 하지만 시황제는 태자 단에게 인정을 두었다. 잠시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는데, 단쪽에서 오히려 먼저 일을 꾸몄다. 태부(太傅) 국무(鞠武)를 불러 진을 도모할 계책을 물었으나 국무가 장구한 합종(合縱)의 계책을 말하자 협객 전광(田光)의 무리와 어울렸다.

전광이 위나라 사람 형가(荊軻)를 소개하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자, 태자 단은 형가를 먼저 극진히 대우해 그 마음을 산 뒤 그와 함께 시황제를 죽일 계책을 꾸몄다. 때마침 진나라 장수 번오기(樊於期)가 시황제에게 죄를 짓고 연나라로 도망쳐 오자 형가는 먼저 그를 달랬다. 반드시 시황제를 죽여 원수를 갚아 준다는 약속으로 번오기를 자결하게 만들고 그 목을 얻었다. 그리고 거기에다 다시 연나라의 기름진 땅 독항(督亢)의 지도를 보태 그 둘을 진나라에 바친다는 구실로 함양을 찾아왔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형가가 부사(副使)격인 진무양(秦舞陽)과 함께 역수(易水)를 건너올 때 거기서 벌인 잔치는 자못 비장하면서도 성대했던 듯싶었다. 공 이루기를 비는 큰 제사에 이어 보내는 자와 떠나는 자가 술잔을 나누는데, 평소 형가와 가깝게 지내던 개백정 고점리(高漸離)는 축(筑)이란 악기를 타고 형가는 구성진 노래를 불러 좌우를 울렸다고 한다.

하지만 시황제로서는 황금 1000근과 식읍(食邑) 1만호를 걸고 쫓던 번오기의 목을 형가가 가져온 데다 전부터 탐내오던 독항의 땅까지 연나라 스스로 바치겠다고 하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그 무렵 총애하던 신하 몽가(蒙嘉)를 통해 접견을 청해온 것이라 더욱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날 형가와 함께 온 진무양이란 자는 아무래도 이상했다. 안색이 변한 채 벌벌 떠는 모습이 여느 사자 같지 않았다. 형가도 독항의 지도를 펴면서 본색을 드러냈다. 말아온 지도가 펼쳐지면서 두루말이 안에서 날카로운 비수 한 자루가 나오자 갑자기 왼손으로 진시황의 옷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비수를 거머쥐었다. 역시 나중에 들은 일이지만, 서부인(徐夫人)이란 이에게서 황금 100근을 주고 샀다는 그 비수에는 사람의 몸에 닿기만 해도 선 채로 목숨이 끊어진다는 독이 발라져 있었다.

시황제가 놀라 뿌리치자 소매가 뜯겨져 나갔다. 이어 장검을 뽑으려 하였으나 칼이 길어 얼른 뽑히지가 않았다. 이때 형가가 다시 비수를 들고 다가와 시황제는 기둥을 잡고 돌며 몸을 피했다. 진나라 법으로 신하들은 궁 안에서 한 치의 무기라도 지닐 수가 없었고, 시위하는 낭중(郎中)들은 병기를 지니고 있었으나 왕명이 없이는 전상(殿上)으로 오를 수가 없었다. 다만 신하 중에 하나가 급한 소리로 외칠 뿐이었다.

“칼을, 칼을 메소서!”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시황제는 칼집을 등에 지듯 메고서야 겨우 칼을 뽑을 수가 있었다. 얼른 돌아서서 뒤쫓는 형가의 왼다리를 칼로 치자 형가가 쓰러진 채 비수를 던졌다. 다행히 비수는 빗나가 구리기둥에 꽂히고, 이제는 시황제가 손에 든 것 없는 형가를 쳐 여덟 군데나 상처를 입혔다. 그런데 돌이켜볼 때마다 섬뜩한 일은 그 다음에 있었다. 마침내 일이 글렀음을 알아차린 형가가 기둥에 기대앉아 웃으며 말했다.

“내가 실패한 까닭은 옛적 노나라의 조말(曹沫)이 제환공(齊桓公)에게 그러하였듯 나 또한 진왕을 사로잡아 협박하여 연나라에 양보하는 약속을 받아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를 알아준 태자의 은혜에 보답하려 했으나 오히려 여정을 죽일 틈만 잃고 말았으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인가!”

그리고는 그때서야 밀려든 시위들의 칼날 아래 비명 한마디 내지 않고 죽어갔는데,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형가가 자신의 목숨만을 노렸다면 열에 아홉 그 뜻을 이루었으리라는 게 직접 그 일을 겪은 시황제의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더욱 치솟은 분노는 태자 단을 죽이고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난 여러 해 뒤까지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육국을 모두 아우르고 시황제가 된 오늘까지 아직도 그런 쥐 같은 무리가 남았다니. 내 이번에 반드시 그 뒤를 캐어 천하에 밝히고 역도들을 엄히 벌하리라. 두 번 다시 나의 제국 안에서 감히 나를 노리는 무리가 없게 하리라!)

하지만 그 일은 뜻 같지가 못했다. 시황제는 신정(新鄭)에서 열흘이나 머물며 창해역사의 시체를 성문에 걸어놓고 그가 누군지를 물어보게 하였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또 전국에 유성마(流星馬)를 띄워 행실이 수상쩍은 자객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게 하였으나 박랑사의 일과 연관된 자는 아무도 찾지 못했다.

이에 마침내 잔당(殘黨)을 잡기를 단념한 시황제는 수레를 몰아 동쪽으로 갔다. 먼저 지부산(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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