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우울증이 명작을 낳았다? '피카소의 청색시대'

  • 입력 2002년 4월 19일 17시 31분


'청색 시대'의 대표작 '늙은 기타리스트'
'청색 시대'의 대표작 '늙은 기타리스트'
피카소의 청색시대/정유석 지음/289쪽 9000원 중앙M&B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대가 빌렘 드 쿠닝(1904∼1997). 그의 작품은 1980년경을 전후로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물감을 두껍게 반복해서 바르던 원래의 화풍이 사라지고, 원색의 선을 주로 사용하면서 여백을 많이 남기게 된다. 제작 속도도 훨씬 빨라져 10년 동안 300점 이상의 유화를 내놓게 된다. 노년에 이른 그가 크나큰 예술적 자각에 이르러 작품 경향이 바뀐 걸까?

“아니.” 저자의 결론은 현실적이지만 작은 충격을 준다. “80년대 이후 드 쿠닝의 작품이 변화한 것은 알츠하이머병 때문이다.”

발병에 대한 정황도 명확하다. 1950년대 술고래로 낙인찍혔던 그는 1981년에야 술을 끊을 수 있었지만 알코올에 의한 대뇌 손상이 진행되기 시작했다는 설명. 그러나 의학적 설명이 어떻든, 평론가들의 말은 약간 다르다. “그의 말기 작품에서 색조는 밀도가 엷어졌지만 대신 솔직함이 드러난다. 이 작품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찬란하다.” (미술평론가 제리 개럴스)

미국에서 정신과 개업의로 활동 중인 저자는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해 예술작품에 나타난 정신병력적 의미를 파헤친다.

불꽃같은 삶을 산 시인으로 미국 여성들의 우상이 된 실비아 플라스(1932∼1963). 그의 소설 ‘종 모양 단지(The Bell Jar)’는 유리병에 갇힌 태아의 상징을 통해 의욕을 잃고 철저하게 수동적인 상태에 놓인 주인공을 묘사한다. 실제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의 우울증 병력을 치밀하게 반영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주인공 에스터의 우울증과 같은 ‘마음의 행로’를 걸은 끝에 플라스는 자살에 이르고 만다는 것.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뉴턴의 수은중독에서 클린턴 성기의 기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학지식을 위인 명사들의 삶으로 버무려 소화하기 쉽도록 엮어냈다는 데 있다. 반면 이 책이 가진 약점은 구성의 산만함이다. 한국과 미국의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을 세 개의 주제로 묶어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각 장 역시 일관된 체제로 이어져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정신병력이 예술작품에 미친 영향 못지않게 우리의 시선을 끄는 부분은 역시 명사들의 화려한 병력이다. 안무의 귀재 조지 발란신(1904∼1983)을 죽음으로 이끈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당시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희귀병 ‘크로이츠펠트-야콥씨 병’이 그 병명이었다. 오늘날 ‘광우병’으로 알려진 무서운 재앙의 초기 희생자였던 것.

어떻게 그가 이 병의 제물이 되었을까? 재력 넘치는 무용가들이 흔히 그랬듯, 발란신도 ‘젊음’ 유지에 유난히 집착했다. 그가 맞은 회춘제에 소의 고환 같은 호르몬 분비조직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를 통해 광우병이 전이되었을 것이라는 분석.

이 책의 표기 원칙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실비아 플라스’로 알려진 인물을 ‘실비아 플랫’으로 표기한 것은 현지어에 더 가까운 발음을 사용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이탈리아 오페라 ‘투란도트(Turandot)’를 ‘튜란도’로 표기한다던가, 프랑스어 ‘아르 누보’(Art Nouveau)를 ‘아트 누보’로 표기한 것 등은 특히 눈에 거슬린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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