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안영섭/대통령 결단 미루지말라

  • 입력 2002년 4월 21일 18시 28분


한 나라의 최고 국정운영 책임자라면 적어도 그 정치사회가 지닌 가장 심각한 문제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것들의 해소에 필요한 강력한 의지와 수단으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대통령의 기본 자질에 속한다.

한국사회가 최우선적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의 하나가 권력형 부패라는 것은 상식이다. 실제로 김대중 대통령은 부패가 시급히 척결돼야 함을 누차 강조했다. 우리 사회의 권력형 부패의 본질과 척결방법을 정치 9단인 김 대통령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세 아들 문제 특검제 필요▼

그런데도 김 대통령의 세 아들 관련 비리의혹들이 줄이어 불거지면서 우리 사회는 지금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시끌시끌하다. 따라서 요즈음 국민은 ‘준비된 대통령’의 개념을 파악하는 데 혼란을 느끼고 있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면 아들들에게 부패에는 강한 대결의지를 보이고 특권의식은 곧 자기파멸이라는 점을 강조할 것이다. 동시에 친인척의 철저한 관리를 위해 관계자들에게 친인척 비리와 관련된 모든 정보는 대소를 불문하고 즉시 보고할 것과 이 임무에 소극적인 사람은 옷 벗을 각오를 하라고 당부하면서 모든 정보기관의 상호감시체제도 풀 가동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의지가 천명되지 않았거나 관련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거나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 아들 관련 비리의혹들은 3남인 홍걸씨의 경우가 가장 심각하다. 홍걸씨의 호화 유학생활은 일반 시민의 아들이라고 해도 지탄받기에 충분하다. 홍걸씨에 대한 의혹의 핵심은 그의 수입이나 신분 등을 고려할 때 전연 어울리지 않는 미국 주택과 일산 땅의 매입, 이신범 전 의원에게 건넨 11만달러 등 돈의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게다가 국적까지 미국시민이라고 했다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세 아들 관련 의혹들은 단순한 여야 정치공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실체적 진실이 명쾌하게 밝혀져야 하므로 김 대통령은 엄정 수사를 지시해야 한다. 특검제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 특히 홍걸씨가 사용한 거액이 미래도시환경 대표 최규선씨 등의 이권청탁과 관련이 있다면 당연히 구속돼야 한다.

무엇보다도 해외도피 중인 최성규 총경이 이만영 대통령정무비서관의 말이라며 최규선씨에게 해외 밀항토록 종용했다고 최씨가 진술함으로써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한 김 대통령의 투명한 수사 지시는 이제 불가피해졌다. 이 진술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청와대 관계 비서진이나 김 대통령에게 책임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비서진이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고 자체 수습을 시도했다면 이것은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 김 대통령이 보고를 받고도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면 대통령 책임문제가 대두한다.

향후 사태 전개에 따라 김 대통령에 대한 조사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 조사와 관련된 현실적 문제는 중대한 딜레마에 봉착한다. 임기를 마칠 무렵의 레임덕 대통령이 조사를 받을 경우 권력의 진공상태가 초래돼 국가관리가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지방선거, 월드컵, 대선 등 국가적 과제를 차질 없이 치러야 할 시점에서 국가 최고통치권 행사의 차질은 신중히 고려할 문제다. 또한 면책특권이라는 법적 문제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조사를 받고 책임질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져야 한다는 국민의 목소리가 높아질 경우 이를 해소하지 않고는 어차피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는 것도 문제다. 대통령에 대한 조사 여부는 아들들의 비리의혹과 대통령이 여기에 관련된 성격과 수준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를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국가위해 임기중 마무리를▼

대통령 아들 비리의혹 문제는 이 정권의 임기 중에 끝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든 차기 정부는 국정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김 대통령에게는 의혹의 전모를 신속 정확하게 밝히려는 결단이 가장 필요하다. 그 결과에 따라 아들의 구속과 대국민 사과를 하고,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 자신도 응분의 책임을 지겠다는 민주주의 존중의지가 중요하다. 현직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의미하기보다는, 역설적으로 그 가치와 규범이 살아 있음을 입증한다. 한국민주주의가 취약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역동적으로 성숙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안영섭 명지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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