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산골마을에서 살아온 한 이름없는 할머니와 그의 꼬마 손자 이야기가 극장가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4월5일 개봉한 이정향 감독의 영화 ‘집으로...’는 4월13일 현재 130만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 모으며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 중 같은 기간 내 최고 흥행기록을 수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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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로 여성감독들의 영화 |
낯익은 얼굴의 스타 한 명 없는, 순 제작비 15억원의 ‘작은’ 영화가 이렇게까지 성공을 거두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의 반응은 대체로 “오랜만에 만나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영화”라는 것. 이 영화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비롯해 각종 영화 관련 사이트 게시판에는 “조폭 영화, 양아치 영화에 지쳐 있었는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삶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는 영화다”는 식의 감상 후기가 속속 올라오고 있다.
영화를 홍보하는 이손기획의 박소연 팀장은 “외할머니와 고향이라는 우리 마음속의 ‘원형’을 그려내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를 획득한 것이 흥행의 키워드로 작용했다”고 말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는 ‘이 영화를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들께 바칩니다’는 자막이 뜬다.
만약 이런 영화를 남성감독이 만든다면? 사실 상상이 잘 안 된다. 이정향 감독은 아흔 살까지 살다 가신 할머니에 대한 추억과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자체를 떠나, ‘집으로...’의 흥행은 우리 영화계에서 여성 흥행감독을 배출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이정향 감독의 첫 장편영화는 ‘미술관 옆 동물원’. 이 역시 상큼하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로 화제를 모으며 심은하라는 스타를 앞세워 전국적으로 60만∼70만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이 영화는 대종상, 청룡상, 영평상, 춘사영화제 등 그해 신인감독상을 모두 휩쓸었다. 이쯤 되면 이정향 감독은 비평과 흥행 양쪽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여성감독인 셈.
◈2000년엔 여성감독 영화 단 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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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만큼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최근 들어 우리 극장가엔 여성감독들의 영화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지난해 하반기에는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와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개봉됐고, 올해 초엔 이미연 감독의 영화 ‘버스, 정류장’이 개봉됐다. 박찬옥 감독의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을 비롯해 현재 개봉을 기다리고 있거나 기획·제작중인 영화만도 7∼8편이 된다. 2000년에 제작된 총 55편의 한국 영화 중 여성감독의 영화는 변영주 감독의 다큐멘터리 ‘숨결’ 한 편뿐이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라.
전문가들은 여성감독들의 영화가 폭력과 코미디로 점철된 한국 영화에 새로운 희망이자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최근 대규모 제작비에 화려한 스타를 앞세워 개봉했던 남성감독들의 영화(‘피도 눈물도 없이’ ‘복수는 나의 것’ 등)가 줄줄이 흥행에 실패한 상황에서 ‘집으로...’의 예상치 못한 흥행 성공은 연이은 폭력코드 영화에 싫증을 느낀 관객들이 섬세한 스타일의 여성감독 영화에 눈길을 돌리고 있음을 증명한다.
여성영화인모임 채윤희 대표(올댓시네마)는 “여성감독들의 영화는 대체로 액션보다 드라마가 강세고, 삶의 여러 풍경을 담은 독특한 소재가 많다. 충무로의 도제시스템이 파괴되면서 감독이 되는 경로가 다양해진 것도 여성감독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전 같으면 ‘여자가 거친 영화 현장을 잘 통솔할 수 있을까’ 의심하는 제작자도 많았고 감독의 능력으로 남성적인 카리스마와 통솔력을 우선 순위로 꼽았지만, 제작과정의 합리화와 전문화가 이루어진 지금의 영화계에서 여성들도 본인의 능력과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감독이 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는 뜻이다.
여성감독들의 약진은 한국 영화의 다양화와 새로운 실험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남성감독들의 영화가 주로 남성적 팬터지인 ‘의리’와 ‘우정’에서 영화적 감동과 재미를 선사한다면, 여성감독들의 영화는 주로 주변부 인간들의 삶에 대한 관심과 소소한 일상에 천착함으로써 남성감독들의 영화와 차별화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집으로...’ 이전의 여성감독 영화들이 흥행에 부진했던 점을 상기하면 여성감독들의 관심이 대중의 그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 영화평론가 김시무씨는 “여성감독의 영화라 하면 흔히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이해되곤 한다.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에 함몰되다 보면 사적인 영화가 되어버려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주변부 인간들의 삶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감성적이고 섬세한 여성감독들의 영화가 한국 영화의 질을 높이고 대중들과 행복한 ‘조우’를 계속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신을진 주간동아기자 happye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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