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센터(WTC)가 사라진 공터에는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아직 테러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듯 곳곳에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으나 뉴요커들의 발걸음은 예전과 다름없이 분주하기만 하다.
맨해튼 61번가 리전시호텔에서 그랜트를 만났다. 첫 인상이 신선했다. 1982년 스크린 데뷔 이래 총을 든 배역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그를 9·11 테러 참사가 일어난 뉴욕에서 만났다는 사실이 묘한 감회에 젖게 했다.
그는 최근 촬영을 마친 코미디 영화 ‘어바웃 어 보이(About a Boy)’에서 백수로 살다가 한 아이를 통해 진정한 사랑과 삶의 의미를 깨닫는 ‘윌’로 출연했다. 국내 개봉은 8월.
그는 이번 배역에 대해 “가벼운 코미디 연기가 좋다. 뭔가 모자란 듯한 캐릭터는 생기가 있고 연기하기에도 스릴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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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쿨
“그러면 싫어하는 역할이 있나요?”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 같은 역이요. 고상한 대사를 읊는 것처럼 빈틈없이 우아한 배역은 자신 없어요. 지루하거든요.”
‘어바웃 어 보이’는 영국 작가 닉 혼비의 밀리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코미디. “또 로맨틱 코미디냐”라고 묻자 그는 “‘로맨틱’은 관심없으나 ‘코미디’는 계속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긴 곱슬머리에 동그란 파란 눈으로 여성의 모성애를 자극해 온 그는 이번 영화를 계기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머리를 ‘레즈비언 스타일’로 짧게 친 뒤 까맣게 염색하고 말투도 똑 부러지게 바꾸었습니다.”
영화에서 그는 실제 자기 나이보다 네살 어린 38세의 백수. 런던 북부의 아파트에서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저작권료로 먹고 살며 여자들에게 추근대는 여피(Yuppie)다.
“그 이미지에 이런 헤어 스타일과 뚜렷한 목소리는 ‘필수요소’이지요.”
속도위반을 절대 하지 않는 그는 최근 영국 ‘에이스톤 마틴’사의 스포츠카 ‘뱅퀴시’를 샀다. 최고 시속 306㎞를 내는 이 차는 그랜트에게 큰 ‘도전’.
“짧게 친 머리는 마음에 들어요. 감고 나서 금방 마르고…. 그런데 차는 무서워요. 너무 확확 나가서 깜짝깜짝 놀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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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증
그는 ‘클로즈 샷(Close Shot)’에 약하다.
“화면 가득 얼굴을 잡고 감독이 외치죠. ‘자, 재미있는 대목이니까 이렇게 연기해야 돼!’ 그러면 저는 미쳐버립니다.”
그랜트는 코미디 연기의 핵심은 천연덕스럽게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코미디 연기에 들어갈 때 가장 긴장한다. 자연스러움을 위해 촬영 전 수십 번이나 상황을 떠올리고 감정을 잡고, 감독을 밀치고 카메라 각도와 조명 상태를 직접 점검한다.
‘어바웃…’의 폴과 크리스 와이츠형제 감독, 조연배우 토니 콜레트 등은 “그랜트는 매우 명민(bright)하나 촬영 때는 신경이 예민해지는(Neurotic) 사람”이라고 귀띔했다.
“연극 무대에서는 떨린 적이 없어요. 5000명, 1만명, 다 ‘OK’. 카메라는 틀려요. 얼굴을 크게 잡고 표정연기 하나 하나를 분석하기 시작할 때, 내가 의사에게 가면 신경증 진단을 받을 겁니다. 웃기는 연기는 고통의 산물입니다.”
# 외로운 그랜트
그랜트는 블루진과 검은색 스웨터 차림이었으며 인터뷰 도중 수시로 작동하는 객실의 에어컨에 대해 “춥다”고 불평했다. 이어 “13년간 함께 지내온 모델 겸 영화제작자인 엘리자베스 헐리(37)와 2년 전 결별한 뒤 사는 게 힘들겠다”고 하자 그는 “이제는 많이 안정됐다”며 웃었다. 그러나 와이츠 형제는 “헐리와 결별한 뒤 그랜트는 ‘친구’가 필요했고 촬영 도중 짬이 날 때마다 셋이서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셨다”고 전했다.
“이루지 못한 꿈이 있나요?”
“소설 또는 시나리오를 써서 직접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꿈을 위해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시간이 날 때마다 습작을 하고 있지요. 제 방에 가면 종이가 ‘이만큼’ 쌓여 있어요.”
그랜트는 현재 샌드라 불록과 또다른 로맨틱 코미디 ‘투 윅스 노티스(Two Week’s Notice)’를 뉴욕에서 촬영 중이다.
뉴욕〓나성엽기자 cpu@donga.com
◈ 휴 그랜트(Hugh Grant)는…
1960년 9월9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휴 그랜트는 95년 '엠파이어'지가 선정한 '100대 섹시 스타'에 들었다. 같은 해 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 여성과 카섹스를 벌이다가 경찰에 연행돼 1180달러 벌금형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로 인해 그는 2000년 연인 엘리자베스 헐리와 결별했다. 그는 1994년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에 여주인공 앤디 맥도웰과 누드신을 찍지 않는 조건으로 출연해 골든 글로브상 등을 받으며 정상에 올랐다. 99년에는 줄리아 로버츠와 주연한 '노팅힐'로 골든 글로보상 후보로 선정되기도 했다. '노팅힐'은 '네 번의 결혼식…'의 작가와 제작팀이 다시 뭉쳐 만든 작품. 그랜트는 82년 옥스퍼드대 문학과 재학당시 영화 '특권층'(Privileged)으로 영국에서 처음 주목을 받았다. 이어 8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영화 '모리스'로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그는 고뇌하는 동성애자 역을 맡았다. 2001년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못난 여주인공 브리짓에게 추파를 던지는 직장상사역으로 나와 로맨틱 코미디 전문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데뷔 이후 모두 50여편의 영화와 TV드라마에 출연했으며 출연작 중 1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작품은 '노팅힐'이다. 최근 출연료는 편당 750만달러선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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