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그때 그이야기]제10회 서독대회 <하>

  • 입력 2002년 5월 1일 17시 57분


결승전에서 네덜란드의 축구스타 요한 크루이프(오른쪽)가 서독수비수에 걸려 넘어지고 있다.
결승전에서 네덜란드의 축구스타 요한 크루이프(오른쪽)가 서독수비수에 걸려 넘어지고 있다.
1974년 서독월드컵에서 승점 1점도 얻지 못하고 3전 전패를 당한 팀은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와 아이티 두 나라였다.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두 나라는 당시 월드컵에서 보기 드문 큰 점수차로 대패했다. 아프리카 대표 자이르는 유고와의 경기에서 0-9로 패했고, 북중미카리브 대표로 출전한 아이티는 폴란드에 0-7로 졌다. 이 점수차는 월드컵에 첫 출전한 한국이 헝가리와 터키에 각각 0-9, 0-7로 패했던 54년 스위스월드컵 이후 최다 점수차였다.

두 나라가 대패한 데는 대표팀에 대한 독재자의 횡포와 이에 불만을 품은 선수들의 ‘태업’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유고 출신의 명장 비디치 감독이 이끄는 자이르는 1차전에서 전통의 명문 스코틀랜드에 선전 끝에 0-2로 패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와 실력이 비슷한 유고와의 경기에서는 0-9라는 기록적인 패배를 당했다. 1차전이 끝난 후 비디치 감독이 전격 해임된 게 원인이었다. 당시 자이르의 군사독재자 모부투 장군은 서독에 있는 자이르 팀에 긴급 전보를 보냈다.

“유고와의 경기에 유고 출신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길 수 없다. 대신 체육부 장관이 감독을 대신하라.”

독재자의 한 마디에 축구 문외한인 체육부 장관이 감독을 맡자 선수들은 반기를 들었다.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그라운드를 누볐던 선수들은 유고전에서는 뛰려 하지 않았다. 전반 17분까지 세 골을 잃자 장관은 골키퍼를 교체했다. 골키퍼가 교체되자 마자 또 한골을 잃었다. 자이르는 전반에 6골, 후반에 3골을 내주며 무너졌다.

경기가 끝난 후 모부투 장군은 다시 서독으로 긴급 전보를 보냈다. “체육부 장관의 해임을 명한다.”

아이티는 70년 대회 3위팀 이탈리아와의 예선 첫 경기에서 후반 1분만에 선제골을 넣으며 파란을 예고했다. 선제골 소식에 아이티의 독재자 뒤발리에는 상금 30만 달러를 선수단에 주겠다고 전문을 쳐 왔다. 그러나 6분 뒤 이탈리아에 동점골을 허용했다. 뒤발리에의 상금은 20만 달러로 떨어졌다. 1-2로 역전되자 상금은 10만 달러로 낮아졌고, 경기가 3-1로 끝나자 뒤발리에는 상금을 ‘없었던 일’로 했다. 선수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다음 경기인 폴란드전에서 선수들은 태업으로 불만을 표출시켰다. 전반전에만 5골을 내주며 0-7로 무너졌다.

황진영기자 bud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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