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어설픈 엄마의 육아보고서 '엄마 없어서 슬펐니?'

  • 입력 2002년 5월 10일 17시 22분


엄마란 절대 위대하거나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사석원씨 작 '어머니'
엄마란 절대 위대하거나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사석원씨 작 '어머니'
엄마 없어서 슬펐니?/김미경 외 11인 지음/289쪽 8500원 이프

‘직장 다니는 엄마들의 아킬레스건은 죄책감이다. 소풍, 공개수업, 학부모 회의 등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퇴근이 유난히 늦은 나같은 사람들은 눈꼽만큼 적은 저녁시간조차 아이와 함께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우리 아이가 불쌍한 아이라고 동정한다. 한창 세상에 적응하면서 부모에게 할 말도 많은 시기를 함께 할 수 없다는 건 여러모로 (아이에게) 불편한 일이다. 그게 불편한 데서 끝났으면 좋겠다는 게 내 바람이다. 부모가 없는 아이는 외롭다, 쓸쓸하다는 가치평가까지 해서 아이 스스로 불쌍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난 웬만하면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삼간다. 그보다는 야, 우리 딸 이렇게 늦게까지 혼자 있다니 대단한데, 엄마없이 혼자 숙제를 하다니 장해, 목욕도 혼자 했단 말이야? 등등 온갖 칭찬을 한다.’

글쓰기 교사로, 강사로, 여성단체 활동가로, 소설가로, 기자로 제 각각 전문 직업을 갖고 아이를 키우는 열한명 엄마들이 엮은 이 책은 ‘육아 투쟁기’에 가깝다. 삶에 투쟁아닌 것이 있으리오마는 일하는 여자로서, 엄마로서 두가지 일을 양립해야 하는 요즘 엄마들의 삶은 치열하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 책의 저자로 등장하는 열한명의 엄마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아이를 더 똑똑하고 완벽하게 키우기 위한 육아 노하우는 없다, 엄마란 절대 위대하거나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고단한 일상에서 쉽게 지치고 약해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며 그 고통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이와 나누면서 함께 커 가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보통 아이가 부모 밑에서 성장한다고 믿고 있다.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육아’라는 키워드를 통해 삶의 고단한 편린들을 묶은 이 책을 읽다 보면 성장하는 것은 아이들 뿐 아니라 엄마나 아빠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제 몸을 찢어 아이를 낳는 절대 공포를 경험한 여자들에겐 더욱 그렇다. 출산과 양육은 여성에게, 근본적이지만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부가적 경험이다. 그러나 여자들은 그 부가적 경험을 통해 사람을 보는 데 있어서나 세상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전혀 다른 ‘새로운 나’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책에는 자기가 만든 온갖 강박으로 무장했던 똑똑하고 잘난 엄마들이 자식을 통해 ‘열림’을 깨우쳐 가는 자기 고백의 내용들로 가득하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가장 큰 고민은 회사였고 삶의 철학적 고민이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나는 내가 여성 직장인으로서 일로 승부를 보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지나치게 휘둘리며 살아 왔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몰아 세우고 아이의 호소를 애써 외면해 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반성이 든다.’

여성학을 공부한 엄마는 모성신화를 거부하려 하지만 모유를 먹이며 젖꼭지가 찢어져 피가 줄줄 흐르는 고통을 경험하면서 ‘머릿속 모성’을 반성한다. 아이에게 아침밥도 안 먹이고 학교를 보내면서도 장남감을 살 때는 딸이 여성적인 틀에 갇힐까봐 자동차와 곰인형을 사주었던 ‘먹물 엄마’는 그 모든 것이 어설픈 배움이 낳은 강박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의식 강하고 이기적인 나같은 엄마에게 무조건적인 양보만 용납되는 아이 키우기는 정말 살인적이었다. 아이는 나라는 존재를 한없이 참고 인내하고 죽이게 만들었다. 잠을 축내고, 나만을 위한 시간을 축내면서 나는 아이를 미워했다. 그러나 이제야 깨닫는다. 부모의 태도는 아이가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었다. 아이는 내가 공포스러워하면 같이 겁에 질렸고 침착해지면 안정을 찾았다. 아이들 앞에서 되도록 낙천적이고 대범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이 낳은 지 3년만에 맞는 첫 출근 날, 배가 아프다고 세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아이를 변기에 앉혀놓고 “내가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은 너 때문이야”라고 소리를 질렀던 엄마는, 이렇게 아이 기르기를 통해 인내와 양보를 배운다.

‘엄마들은 아이를 통해 다시 산(生)다. 잊어버린,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 천방지축 방방 뛰고 행복했을, 기억할 수 없는 이유로 상처받기도 했을 그 때를 아이를 통해 다시 경험하는 것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사랑,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물, 사건이 궁금한 순수한 호기심, 배움에 대한 욕구, 계산하지 않는 즐거움, 나에게도 그런 것들로 가득한 날이 있었을까?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는 바로 딸을 통해서가 아닐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사춘기 이후 내 엄마에게 심하게 반항했던 나를 떠올리면서 지금의 내가 어쩔 수 없는 순간들이 있는 것처럼 그때 엄마도 어쩔수 없는 순간이 있었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를 위해 더 많이 각성하고 부지런해지고 더 많이 투자하라고 엄마들의 숨통을 조이는 육아 정보서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요즘, 이 책은 훌륭하고 대단한 위인을 길러 낸 어머니의 육아 성공담이 아니라 현장의 책이며 ‘과정의 책’이다.

생후 4개월부터 아이를 탁아소에 맡겨 둔 엄마, 어린 아이를 두고 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야 했던 엄마, 이혼하면서 아이와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엄마 등등 결점 투성이, 상처 투성이 엄마들은 10년 육아 경험을 통해 초보엄마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아이를 잘 키우려는 강박속에서 괴로워하지 말고 엄마가 자라야 아이도 자란다는 것을 믿으세요. 아이들은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잘 자란답니다. 엄마도 부족하고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이들과 나누세요. 아이들은 완벽한 엄마보다 솔직한 엄마와 자랄 때 더 잘 자란답니다. 초보 엄마들 파이팅!’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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