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은 매일 아침 신문을 읽는 것을 세계 역사 앞에서 기도 드리는 것이라 했다. 프랑스 철학자인 데리다는 TV를 보면서 르펜의 국민전선이 집권할 것을 우려하고, 일요일 이른 아침마다 보는 (아레테 방송의) 고급 프로그램이 더 널리 퍼지기를 바라며, TV가 만드는 인공적 현실과 그 작용에 대해서 사색한다. 이런 TV보기는 현실에 참여하고 현실에 대해서 발언하는 방식의 하나일 것이다.
왜 데리다와 그의 제자인 스티글러가 TV 안에서 대담을 할까? 이들은 TV가 만드는 인공적 현실의 위험성에 맞서려고 (단순히 TV를 끄고 바깥에서 점잖을 빼는 것이 아니라) 안에 뛰어 들어서 그 내용과 형식을 바꾸려고 한다. 일종의 내재적 비판이다.
한때 TV를 ‘바보 상자’라고 불렀다. 이것은 TV라는 그릇이 담고 있는 내용에 불만을 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그 수준을 높이면 ‘영재상자’로 바뀔까?
문제는 TV가 어떤 내용을 담는가가 아니라 어떤 형식으로 나름의 현실을 만들고 그것을 이용하면서 세계를 뒤흔드는가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데리다는 TV가 만드는 세계, 그 말과 이미지를 철학적으로 분석한다.
소크라테스나 공자는 왜 글을 쓰지 않았을까? 서로 대화하는 경우에는 곧바로 말하고 듣기에 어떤 이질적인 요소도 개입되지 않고 오해할 소지도 적다. 그런데 그것이 글로 바뀌면 ‘말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아무나 보고 제멋대로 해석할 위험에 처한다.
데리다는 이런 사고방식이 ‘음성중심주의’이며, 순수하고 원초적인 ‘음성’이 그 파생물인 불순하고 불확실한 글쓰기에 우선한다고 본다. 이런 문제의식은 TV가 만드는 이미지와 말에도 이어진다.
우리는 TV를 보면서 생생한 말을 듣고 살아있는 원래 이미지를 보는 것이 아니다. 녹화하는 동안 데리다는 기계 장치가 요구하는 말을 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고, 또 그가 말하는 내용이 녹화되고 전달되는 과정에서 제작자가 기술적으로 개입한다. 시청자는 이런 메아리를 기록한 것(에코그라피)을 보고 들으면서 그것을 생생하고 순수한 것이라고 오해한다.
이런 말과 이미지는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미지를 만드는 원격기술들은 원래 이미지가 사라지고 죽은 곳에서 그것을 유령처럼 불러내고 생생한 존재로 만들어서 퍼뜨린다.
그런데 데리다의 이런 분석은 나아가 TV가 보여주는 세계에 포착되지 않는 세계의 수많은 재난들을 문제삼기 위한 것이다.
그는 신자유주의 이후 널리 퍼진 ‘새로운 질서’의 이데올로기가 ‘제 궤도를 벗어난(out of joint)’ 이 시대의 어두운 그림이라고 본다. 그는 ‘다른 세계’를 만들기 위한 사건을 기대하면서 ‘새로운 연대’를 권한다. 물론 이 연대는 어떤 조직이나 중심 없이, 강령 없이 법과 질서를 넘어서는 정의, 타인에 대한 환대를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는 ‘시대를 거슬러’ 새로운 현재를 모색하는 비판적 철학자이다.
데리다의 책은 난해하다. 이 책도 쉽진 않지만 2장부터 본다면 역자들의 빼어난 번역과 자상한 역주의 도움으로 TV가 만드는 현실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좋은 예를 접할 수 있다. 이제 TV를 보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기가 어떤 수신자인지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양운덕 고려대 강사·서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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