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후보
1994년 11월 서울 중구 필동의 남산골 공원에는 16.1m 깊이의 땅 밑에 ‘타임캡슐’이 묻혔다. 서울시가 ‘정도(定都) 600년’을 맞아 400년 뒤의 자손들이 꺼내 볼 수 있도록 우리 시대상의 문물 600점을 수장한 것.
캡슐엔 토지거래 허가제에 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 하나가 포함돼 있다. 그 판결문의 다수의견은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가 대법관 시절에 썼다. 이 후보는 그만큼 법조인으로서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대법원판사가 되기 전엔 세상에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판사로 임용된 다음해인 61년 5·16군사정변 직후 혁명재판소에 차출돼 진보적 일간지인 민족일보 조용수(趙鏞壽) 사장에 대한 재판에 관여한 것이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연거푸 사형이 떨어지자 방청객은 일제히 웅성대고 몇 명은 통곡했다. 이날 공판은 사형도 3명으로 기록이고, 법정이 통곡으로 소란한 점에서도 기록적이었다.”(동아일보 61년 8월29일자)
당시 혁재(재판장 김홍규·金弘圭 대령)는 민족일보가 북한의 주장에 동조했다는 공소사실을 인정해 조 사장 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대해 조 사장과 대구 대륜중 동기인 이만섭(李萬燮) 국회의장은 “5·16군사정변 직후 집권한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반공을 국시로 삼은 혁명공약을 발표하고 진보적 인사들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용수가 억울하게 당한 것 아니겠느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반면 이 후보의 측근인 황우여(黃祐呂) 의원은 “사건심리 때 증거불충분을 거론했다가 혁명검찰부장인 박창암(朴蒼岩) 대령으로부터 ‘너 같은 놈 때문에 혁명을 해야돼’라는 질책을 듣고 사표를 냈으나 박 대령의 사과와 함께 사표가 반려됐다. 당시 이 후보도 내적 갈등이 많았다”고 전했다.
이 후보 자신은 “혁재에 차출됐을 때 나는 주심판사도 아니었고 내 소신이 재판 과정에 반영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혁명검찰부와 재판진행을 놓고 의견충돌을 빚은 적이 있었으나 지금 그때 일을 자세히 언급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만 밝히고 있다. 사표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한말숙(韓末淑)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의 오빠로 6·25전쟁 때 계엄사 법률고문을 지낸 한복(韓宓·94년 작고) 변호사는 혁재 참여를 거부하다 고문을 당하고 3개월간 구속되기도 한 시절이었다. 조 사장의 동생 용준(鏞俊·69)씨는 지금도 “재심을 청구할 계획이다. 이회창씨는 당시 사건이 무죄라는 양심선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이 후보가 서울지법 판사로 있으면서 전당대회 폭력사태를 이유로 신청된 유청(柳靑)씨 등 당시 야당의원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은 그의 소신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유청씨도 “당시는 군정(軍政) 시절이었는데 솔직히 놀랐다”고 회고했다.
그 후 이 후보의 판사 경력에서 큰 격랑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71년 검찰의 현직판사 구속영장 청구사건으로 촉발된 제1차 사법파동은 정치권력의 간섭에 맞선 사법부 최초의 저항으로 판사들의 집단사표 제출사태로까지 이어졌으나 ‘이회창 판사’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는 당시 부장판사로 승진해 사법연수원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박정희 정권 말기, 학교 교장이던 사촌형이 택시 안에서 술김에 정부를 비방한 ‘한마디’가 긴급조치 9호에 걸렸을 때도 그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사촌 형수가 밤늦게 ‘SOS’를 쳤지만 그는 “형수님, 포기하십시오”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이 후보가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전두환(全斗煥) 정권 출범 직후인 81년 4월 그가 46세에 대법원판사로 임명되면서부터였다. 3공화국 출범 이후 최연소 기록으로 파격적인 발탁 배경과 관련해선 논란이 있다.
80년 5월 대법원이 박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金載圭) 전 중앙정보부장의 사형을 확정한 이후 소수의견을 낸 양병호(梁炳皓) 대법원판사 등 6명은 신군부의 강압으로 법복을 벗었다. 양 변호사는 훗날 “판결 후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사표를 강요받았다”고 증언했다. 사법부가 최대의 시련을 겪던 시기에 ‘이회창 대법원판사’가 탄생한 것이었다.
신군부 집권 초 청와대 법률비서관을 지낸 박철언(朴哲彦) 전 의원은 “5공 출범과 함께 대법원을 새로 구성하기 위해 여론을 수렴한 결과 소장파 중에서 청렴하고 소신있는 이회창씨가 적임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도 있었지만 결국 전두환 대통령의 승낙을 얻어냈다. 하지만 이씨와의 대화 내용은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이 후보는 “신군부나 박철언씨 등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이를 부인했다.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이종훈기자 taylor55@donga.com
▼노무현 후보
“참 엉터리 판사가 아닐 수 없었다.”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 스스로 판사시절을 회고하면서 한 얘기다. 그가 판사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은 사연은 이렇다.
“한 번은 어묵에 방부제를 섞어 판 보건범죄자가 재판을 받았는데 검찰의 기소가 법 취지를 무시하고 형식논리에만 매달린 가혹한 것이어서 나는 무죄 주장을 폈다. 그러나 합의 결과 유죄가 선고됐는데 얼마 후 그 어묵업자가 술을 사들고 집으로 찾아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무죄판결을 못 내려 아쉬워하고 있던 나는 내친 김에 밤을 홀딱 새워가며 항소이유서를 대신 써줬고 자연히 그와 친해져 가끔 술을 얻어먹기도 했다.”
만 31세인 77년 9월 대전지법 판사로 임관한 그는 판사생활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자전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선 “단조로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갑갑하게 느껴질 정도로 수동적인 업무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는 “초임판사치고는 내 주장이 강해 비교적 무죄 석방, 집행유예 주장을 많이 했다”고 하면서도 “판사시절에 별로 모범적이지도 우수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경험 없던 시절 변호사에게 밥이나 술을 얻어먹는 당시의 잘못된 분위기에 휩쓸려 다니느라 공부도 제대로 안한 것 같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노 후보는 ‘수습’판사 격인 합의재판부의 좌배석판사(가장 경력이 짧은 판사)로만 8개월 정도 근무했기 때문에 판사로서의 철학과 소신을 확인할 수 있을 만한 판결은 남기지 못했다. 당시 우배석판사였던 김성만(金聖滿) 변호사의 ‘노무현 판사’에 대한 기억.
“어떤 농민이 새마을 공판장에서 막걸리를 마시다 벽에 걸려 있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를 떨어뜨려 긴급조치위반으로 구속됐다. 우리 재판부는 이런 식의 긴급조치위반사건 피고인들을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어줬다. 노 판사는 말석이어서 합의 과정에선 집행유예에 동의한다는 정도의 의견만 냈으나 술자리에서 곧잘 ‘나는 판사를 오래할 생각이 없으니 문제가 생길 만한 일이 있으면 내가 총대를 메겠다’고 말하곤 했다.”
당시 재판장이었던 김학만(金學萬) 변호사는 “노 판사는 성실하고 순박했다. 그러나 판사로서 성숙하기 전이어서 그의 판사시절을 뭐라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노 후보는 결국 78년 4월 판사직을 그만두고 부산에서 그저 돈 버는 데 더 관심이 많았던 평범한 변호사로 전신한다. 그가 변호사 개업 후 처음으로 맡은 사건은 마산세무서에 다니다 중앙감사반에 금전수수 비위가 적발된 둘째형 건평(健平)씨 사건.
73년 교통사고로 사망한 맏형을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해온 건평씨는 사법시험 준비를 뒷바라지하고 대전에 판사로 발령이 났을 때 셋집까지 얻어준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런만큼 건평씨가 면직 당한 것은 노 후보가 변호사 개업을 서두른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변호사 개업을 하자마자 노 후보는 당시만 해도 사법서사들이 주로 맡았던 등기업무에 손을 댔다.
마침 부산에 아파트 건설 붐이 일면서 부동산 등기업무가 폭증해 수입이 짭짤했다. 은행에 근무하던 부산상고 동창생들이 등기업무 수임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얼마 가지 못했다. 변호사들이 하나둘씩 등기업무를 따라하기 시작하자 사법서사들이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노 후보 본인은 “전문변호사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막상 개업을 해보니 그날그날 사건에 쫓겨 공부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직원 몇 명만 두면 시간을 덜 들이고도 제법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등기업무에 손을 댔다. 그러나 이런저런 어려움이 많아서 그만 뒀다”고 설명했다.
노 후보는 또 여느 변호사처럼 교제 명목으로 판검사 접대도 했고 사건을 수임하기 위해 브로커에게 커미션을 주기도 했다. 이른바 돈 잘 벌고 잘 노는 변호사 중 하나였다.
그는 변호사를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당사자간에 합의만 하면 변론이 필요 없는 형사사건을 의뢰 받아 수임료 60만원을 받은 뒤 사건의뢰인이 다음날 수임계약 해지를 요구했으나 그 사이에 구속돼 있던 피의자를 접견했다는 이유로 수임료를 돌려주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를 털어놓은 적도 있다.
그는 그러나 이런 관행을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가 전문분야에 집착한 것은 당시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거부감도 작용했다. 전문변호사가 되면 판검사에게 굽실거리지 않아도 되고 사건을 맡기 위해 브로커에게 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로 노 변호사는 84년경부터 부산에서 알아주는 조세사건 전문변호사로 유명해진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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