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20) 잃어버린 얼굴과 무수한 발소리 20

  • 입력 2002년 5월 14일 18시 40분


유미리 (숨을 들이쉰 채로)…할배의 남동생, 이우근이 스물세 살 때 행방불명 됐어요. 학교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다가 다리에 총을 맞아서…할배는 장거리 런너였고 작은 할배는 중거리 런너였습니다. 작은 할배도 올림픽 출전이 기대될 만큼 성적이 우수했다고 하는데…좌익 활동을 해서 경찰에 쫓기고 있었어요.

무당3 걷어찼어…굴로…남자 셋이 둘러싸고 있는 게 보여.

무당2 (피리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수선화를 부른다)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나르는 애닯은 마음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다시 죽는 가엾은 넋①

무당3 쉿! 입을 움직이고 있다…물고기처럼 입만 움직이고 있어…입속에 흙이…죽어서 매장된 게 아니야…아직 숨통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흙을 덮었어…비가 점점 더 오네…아아 비가…파내 주지 않으면 울지도 말하지도 못해.

유미리 …어떻게든 유골을 찾아내서 할배 옆에다….

무당3 너의 사명은 뼈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혼을 끌어올려야지. 닻처럼 가라앉아 있는 너 가족의 혼을. 하나가 아니야. 할배도 할배의 동생도 첫 부인도 첫 아들도 할매도 일본 할매도 모두모두 무거운 한을 껴안고 가라앉아 있어.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 약속은 지키면 끝나지만 지키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어. 너가 죽어도 끝나지 않아.

유미리는 약속이란 말속에 우두커니 서 있다.

유미리 (목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갈아낸다) 이대로 가면 나도 가라앉을까요?

무당3 너나 너 아들이나 다 가라앉아. 가라앉든 끌어올리든 둘 중에 하나야. 니한테 그런 이름이 지어졌을 때부터 너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어.

유미리 내 이름?

무당3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너 할배의 할배도 태어나지 않았을 때, 밀양의 지명은 미리였다.

무당2 미리벌이지.

*①수선화 - 김동진 곡 김동명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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