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21) 잃어버린 얼굴과 무수한 발소리 21

  • 입력 2002년 5월 15일 18시 23분


무당3 너는 그 지명을 짊어지고 있어.

무당2 이름에서 도망칠 수는 없지.

무당3 약속하겠나?

유미리 …네….

무당3 약속한 거재?

유미리 약속합니다.

무당3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어.

유미리는 손바닥을 이마 높이로 올린 채 무릎을 꿇는 조선식 절을 세 번 한 후 일본 사람처럼 정좌하고 두 손 모아 합장한다. 손바닥 안에서 바람이 부는 듯한 느낌이다.

갑자기 무당이 새빨간 치마를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떤다.

무당2 누구요?

치마 속에서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린다.

무당2 이름은?

무당이 고개를 저어 빨간 치마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무당2 태생이 어디신고?

무당3 밀양이라예

무당2 이 씨의 피를 이으셨나?

치마 속에서 머리칼과 비단이 스치는 소리가 난다.

무당2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오셨나? 이름을 말해 주셔야지.

무당3 나미코 하루코 아이코 미요코 후미코 요시코 남자들이 저 좋을 대로 부르대예

무당2 일본 사람이신가?

무당3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말할 수 없어예 주로 나미코라 불렸어예 하지만 나미코라고 부르는 건 싫어예 내 이름은 부르지 말아예

내 얘기 좀 들어보세예 나는 이우근씨보다 네 살 아래라예 집도 가까웠고예 오빠가 셋 있었고 딸은 나 혼자였어예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지 백 일도 못 돼 죽어서 얼굴도 몰라예 엄마가 다른 사람네 밭을 일궈서 우리를 길렀지예 내가 열두 살 이 되던 해에 엄마가 재혼을 했어예 양아버지한테는 딸이 둘 있었고예 같이 산 지 1년이 채 안 돼서 두 언니는 시집을 갔어예 난 양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기가 싫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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