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예종석/월드컵을 볼모 삼지말라

  • 입력 2002년 5월 15일 18시 52분


최악의 시나리오를 한번 생각해보자. 요즈음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걸핏하면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처럼 월드컵 개막일이나 그 직전에 총파업을 강행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보건의료노조 산하의 대형 병원 노조원들이 투쟁에 나서서 환자들이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택시노조가 파업해 택시 운행을 중단하고, 금융노조까지 그 대열에 동참한다면 나라꼴이 어떻게 될까.

▼주5일제 연계투쟁 안될 말▼

세계 각 국에서 귀한 손님들을 모셔다 놓은 경사스러운 자리에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른 투사들이 대오를 지어 목청을 드높이고 도시 곳곳의 교통이 마비된 가운데 경찰이 투입되어 몸싸움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 월드컵 취재를 위해 세계 각 국에서 구름처럼 몰려올 신문 방송기자들은 그 상황을 축구경기보다 더 생생하게 전 세계로 중계할 것이며, 대한민국은 순식간에 16강에 든 것보다 더 유명해질 것이다. 그 후유증이 일파만파로 번질 것은 자명하다.

안 그래도 썩 좋지 않던 국가 이미지는 더욱 추락해 당장 우리 경제의 명운이 걸린 수출에 타격을 줄 것이고, 애써 올려놓은 국가신용등급은 단숨에 하락할 것이며, 외국인 투자는 급감하고, 관광 수입은 곤두박질칠 게 뻔하다. 외환위기 때의 위급한 상황으로 돌아갈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 반도체 자동차 등 몇몇 품목의 수출 호조에 의존해 회생하고 있는 우리 경제 입장에서 볼 때 전혀 불가능한 시나리오만도 아니다.

정반대의 상황도 한번 생각해보자. 철도노조와 자동차노조의 월드컵기간 무파업 선언에 감명 받은 양대 노총의 지도부가 아무런 조건을 내걸지 않고 월드컵 기간 중의 노사평화 선언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식들 문제로 세상에 얼굴 들기 힘들게 된 김대중 대통령의 호소에 감명 받아서가 아니라 노조원들이 충심으로 국익에 우선하는 것은 없다고 판단해 소아(小我)의 희생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노동계의 자발적 평화선언에 감동 받은 사용자측도 월드컵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 노조측의 요구 사항을 최대한으로 수용하겠다고 화답을 한다. 그런 전개 과정을 바라보는 정치권은 무안해서라도 정권 쟁취에 혈안이 되어 남의 비리나 캐는 지저분한 정쟁을 중단하고 평화선언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오면 온 국민의 관심과 뜨거운 성원 속에 월드컵은 성공적으로 개최될 것이고, 국가 이미지는 개선되어 우리 경제의 회생에 크게 기여할 것이며, 나아가 일류 국가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설마하니 으름장을 놓고 있는 양대 노총 지도부도 파업 강행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협상테이블에서 하나라도 더 얻어내기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월드컵을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또 파업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중요한 시기를 택해 연계 투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 연계 투쟁할 일이 따로 있지, 어떻게 월드컵을 주5일 근무제 쟁취나 기간산업 민영화 저지를 위한 압박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가 말이다. 우리 경제의 활로를 열고 국가경쟁력을 높일 결정적 기회이자 온 나라의 잔치인 월드컵을 결코 집단이기주의의 제물로 삼을 수는 없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하더라도 시기와 방법을 잘못 선택하면 민심을 얻지 못하는 법이다.

이제 노동계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며 그 선택은 당연히 월드컵기간 중 노사평화 선언이어야 한다. 우리가 왜 양보해야 하느냐고 생각하지 말라. 약자가 양보하면 명분을 얻는다. 명분을 얻게 되면 향후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국민의 지지 없이는 노조도 설자리가 없다.

▼노사 평화선언 바람직▼

요즈음 대한민국의 국위 선양은 최경주 박세리 박찬호 김미현 같은 젊은 스포츠 스타들이 도맡아하고 있다. 이 젊은 아들딸들은 낯선 이국땅의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나라를 빛내고 있는데 우리는 안방에서 하는 큰잔치를 가족의 이기심 때문에 망칠 지경에 와 있다.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노동계가 자발적으로 무파업 선언을 한다면 온 국민이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며 국력을 한층 결속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번만큼은 양보의 미덕으로 나라를 살리자. 국민은 노동조합이 국위 선양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예종석 한양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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