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일수/폭로, 민심 병들게 한다

  • 입력 2002년 5월 19일 17시 59분


대통령의 아들이 구치소로 끌려가는 모습은 5년 전과 흡사하다. 5년 전처럼 도지는 악습 하나를 더 들자면 구태의연한 폭로정치다. 지난 대선 막바지에 태풍처럼 휘몰아쳤던 폭로 사건은 김대중 후보가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비자금 ‘20억원+α설’이었다. 당시 여당은 검찰이 야당 후보를 불러들여 당장 수사를 벌여야 한다고 아우성이었다. 현재 잠재적으로 가장 큰 폭발력을 지닌 뇌관은 설훈 의원이 폭로한 최규선씨의 20만달러 한나라당 제공설이다. 민주당과 노무현 후보는 이 다이너마이트에 불길을 댕기고자 연일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럭비공 같은 최규선 게이트▼

문제는 이처럼 뜬금없이 쏟아진 폭로전으로 인해 사태가 꼬이고, 공동체가 마녀사냥시대처럼 광기에 휩싸이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부정과 비리를 들추어내는 것 자체를 악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폭로전은 수사기관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정상궤도에서 벗어나 사건을 괴이한 성격으로 변질시키고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최근 불거진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의 탄원서다. 이 서한에 따르면 지난해 6월 스칼라피노 교수는 최규선씨 주선으로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후보 등을 만났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민주당은 설 의원이 폭로한 최씨의 20만달러 한나라당 제공설에 힘이 실렸다고 보고, 검찰을 압박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이 후보와 스칼라피노 교수는 97년부터 잘 아는 사이여서 최씨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는 점과 그래서 두 사람의 만남에 최씨가 배석한 것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지금 최씨 기피 신드롬은 이 후보 측만이 아니라 청와대나 노무현 후보 측도 마찬가지다. 누구든 최씨를 만진 손은 부정하고 크게 덧나게 생겼다는 결벽증과 공포증이 이상하게 정치판을 흔들어 대는 느낌이 든다.

타이거풀스의 복표사업자 선정과 관련된 5인방 중 송재빈씨는 세간의 주목 대상이 안 되고, 김희완씨는 아직도 안전하게 잠행 중이다. 김홍걸씨는 피의자 신분이지만 대통령의 아들로서 정중한 대우는 물론 주밀하게 연출된 동정론의 햇살을 미리 체감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한 사람 최씨만은 바리새인들의 돌팔매질에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다. ‘권력 주변을 맴도는 불나방’이니 ‘자기 과시욕과 탐욕의 화신’이니 하는 온갖 인격적인 모독까지 받고 있다. 심지어 스승의 날에는 지난날의 스승조차 이 돌팔매질에 동원되고 있었다.

스칼라피노 교수의 탄원서가 말해 주듯 최씨는 그가 기억하는 인상 깊은 제자요, 한 부모의 사랑받는 자식이며, 한 가정의 기둥 같은 가장이기도 하다. 그가 이 땅을 방문한 옛 스승의 일정을 직간접으로 도운 일이 무슨 큰 탈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어떤 만남을 주선한 일이 사실이라고 한들 그게 인간으로서 못할 짓이었을까. 하지만 최씨의 이름은 오늘의 상황에서 마치 온갖 흉조의 대명사처럼 배척당한다. 마치 우리 사회의 구제역과 같은 혐오대상이 된 셈이다. 죄인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인격의 존엄성이 있지만 마녀사냥의 돌풍 속에서는 이 존엄성의 옷마저 빼앗기고 만다.

최규선 게이트가 몰고 갈 예상 못할 파장은 실로 몰이성적 폭로정치가 몰고 온 공해의 부산물이다. 폭로정치는 결코 민심을 얻는 길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의 마음 속에 의심과 미움을 흩뿌려 놓을 뿐이다. 이것이 자라면 거대한 전체 사회도 무너지고 만다. 근거 없는 얘깃거리가 안방과 식탁에까지 밀려들면 백성들은 그저 공해를 먹고 마시며 눈과 귀까지 버린다. 끝내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까지도 황폐하게 만든다. 폭로정치의 연출가들이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 바로 이 점이다.

▼허망한 말 쓸어버리는 지혜▼

오늘날 우리 정치인들이 댓돌있는 옛집에 살던 선인들의 지혜를 잃어 버린 게 무척 아쉽다. 그들은 뜰을 지나 댓돌을 딛고 뜰 층계를 오를 때마다 밖에서 만난 허망한 이야기들을 쓸어 내버릴 줄 알았다. 옷깃을 가다듬고 마루에 오를 때마다 공동체에 복스러운 말과 덕스러운 생각이 무엇인지를 가다듬곤 했다. 그들은 집안에서 저주스러운 말을 멀리하고 복된 언어로 씨앗을 삼았다. 공동체를 가정처럼 아끼는 정치인이라면 지방선거 대선의 살벌한 경쟁 속에서도 한줌 표를 욕심내 의심과 미움을 확대재생산하지는 않을 것이다. 폭로정치에 일일이 맞상대하기보다 차라리 상식선에서 먼저 진실을 고백하는 것도 민심을 크게 얻는 지름길이다. 덕 있는 지도자가 무척 아쉬운 세상이다.

김일수 고려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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