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문홍/위조지폐

  • 입력 2002년 5월 20일 18시 46분


가장 손쉽게 떼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돈을 직접 찍어내는 것이다. 위조지폐 제조가 오래 전부터 전 세계 범죄자들의 목표가 된 이유가 그것이다. 당연히 위조지폐 기술을 둘러싼 국가기관과 위폐범들 사이의 머리싸움도 갈수록 치열해졌다. 오늘날 전 세계 위조지폐의 대명사격이 돼 있는 ‘초정밀 위조달러’ 일명 ‘슈퍼노트(Super Note)’의 경우가 그 경쟁의 역사를 보여준다. 1996년 미국은 100달러짜리 신권을 발행하면서 은화(隱畵) 시변각(일정 각도에서만 보이는 그림) 등 10여 가지의 개선된 보안조치를 적용했으나 얼마 후 똑같이 위조된 슈퍼노트가 나왔다. 한술 더 떠 작년 10월에는 슈퍼노트보다 더 정교해진 ‘슈퍼슈퍼 노트’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위조지폐 기술은 저급과 중급, 슈퍼노트 등으로 구별된다. 컴퓨터 스캐너나 오프셋인쇄로 만드는 중급 정도만 돼도 일반인들로서는 식별이 쉽지 않은 판에 슈퍼노트는 진짜 돈과 거의 똑같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슈퍼노트는 종이의 조직과 무게, 잉크 성분과 색조가 진짜에 가깝고, 특수 인쇄기로 제작해 감촉 또한 진짜 돈과 거의 같다고 한다. 이 특수 인쇄기는 값도 비싼 데다 국가 조폐기관의 주문을 받아 한정 생산하는 품목이라는 점 때문에 슈퍼노트 제조에는 일개 범죄조직이 아니라 국가가 개입돼 있을 것이라는 얘기까지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이 같은 ‘위조지폐의 천국’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며칠 전 인천공항세관은 평시엔 백지이지만 약품 처리를 하면 색깔과 문양이 100달러짜리 미화(美貨)로 바뀌는 신종 위조지폐를 300만달러 상당이나 적발했다. 위조지폐에 관한 한 국내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외환은행 서태석 차장은 “이런 유형은 98, 99년에도 더러 적발된 적이 있지만 이번처럼 대량은 아니었다”며 “고액권을 선호하는 우리 국민 성향이 위폐범의 활동 공간을 넓혀주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얼마 전 한국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 1·4분기에 발견된 위조지폐는 573장으로 작년 동기(297장)에 비해 92.9%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전국 1000여 군데의 환전소 중 태반은 아직 구형 감식기조차 없다. 길거리 일반 상점에서도 외화로 커피나 담배를 살 수 있는 개방화 시대에 위조지폐 문제는 더 이상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당장 월드컵도 며칠 남지 않은 마당에 국가 차원의 위조지폐 대비책 마련이 급하다.

송문홍 논설위원 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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