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상으로 보면 60억명 남짓한 지구촌 주민 한 사람이 적어도 네다섯번 중계방송을 시청한 셈이다. 1998년 프랑스대회와 2002년 한일월드컵대회는 출전국과 경기 수가 늘어난 만큼 이 수치를 능가할 것이 확실하다.
▼부자가 만들고 노동자가 키워▼
월드컵에 대한 높은 관심은 축구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보급되고 또 가장 사랑 받는 스포츠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1904년 창설 당시 유럽대륙의 7개 국가로 출발한 국제축구연맹(FIFA)이 지금은 유엔보다 더 많은 200개가 넘는 회원국을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 역시 그러하다.
왜 축구가 이렇게 인기를 얻게 되었고 어떻게 그것이 전 세계를 정복하게 되었을까. 축구 애호가들로서는 공과 발이 어우러져 극적인 승부를 연출하는 축구경기 자체의 매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축구가 개별국가 혹은 전 세계 수준에서 인기스포츠로 발전하기까지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고 일정한 역사적 배경이 작용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축구는 19세기 영국의 ‘발명품’이다. 오늘날 행해지는 근대축구의 요람은 이튼을 비롯한 영국의 엘리트 중등학교였고 특히 1863년 이들이 주축이 된 잉글랜드축구협회의 창설은 경기방식에서 럭비풋볼과 구분되는 새로운 풋볼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축구는 영국의 ‘발명품’임과 동시에 ‘수출품’이기도 했다. 19세기 세계 곳곳에 진출한 영국인들은 모국에서 탄생한 새로운 스포츠를 현지에 전파하는 축구 ‘선교사’ 역할을 했다.
영국에서 축구를 탄생시킨 것은 부르주아들이었으나 축구를 키운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축구협회 창설 후 곳곳에 축구클럽이 생기고 전국 각지에서 경기가 행해졌을 때 노동자들은 선수 혹은 관중으로서 축구의 대중화에 이바지했다. 노동운동을 통해 쟁취한 토요일 오후 휴무제와 임금인상 덕택에 축구경기와 그 관람은 많은 노동자에게 주말을 즐기는 유흥이 되었다.
축구의 대중화에는 지역주의와 민족주의도 한몫 했다.
지방축구팀에 대한 지지와 후원은 지방적 정체성과 애향심을 반영했고 동시에 그것을 창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과는 달리 축구의 부르주아적 성격이 오래 지속된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축구는 지역주의보다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후 이들 대륙 내 혹은 대륙간 국제대회가 잇따라 창설되면서 축구는 스포츠 민족주의의 전형이 되었다.
축구의 대중화와 짝을 이뤄 축구발전을 자극한 것은 직업축구의 등장이었다. 아마추어리즘을 고집하는 젠틀맨들의 반발 속에서도 영국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유럽과 남미대륙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종종 아마추어를 위장한 채 프로축구가 도입되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의 갈등을 배경으로 1930년 우루과이에서 개최된 제1회 월드컵대회는 직업축구에 대한 집념의 표현이었다.
대중화와 상업화의 길을 통해 발전한 축구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없을 수 없다. 부르주아 엘리트들은 축구가 아마추어 원칙과 페어플레이정신을 저버리자 고개를 돌렸다.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로부터 유래한 축구에 대해 노동운동을 방해하려는 술책이 아닌가 의심했다. 오늘날 사회분석가들도 축구를 대중의 정치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아편’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때론 ´아편´때론 ´민주화 보루´▼
이러한 분석과 비판은 옳지만 일면적이기도 하다.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남미의 군사정권이 정치선전과 통제수단으로써 축구를 이용하고자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축구는 종전 직후 이탈리아에서는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촉진하기도 했으며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서는 독재에 대한 저항의 보루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모순된 사례들로부터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명백하다. 축구가 결코 정치와 무관한 중립적인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축구 자체가 아니라 축구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수용하느냐하는 점이다.
축구와 정치의 관계는 이제 다시 시험대에 오른다. 월드컵 기간 중 지방선거가 있고 월드컵 결과가 현안인 정치스캔들의 처리뿐만 아니라 연말 대선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니 귀추가 주목된다.
안병직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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