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월드컵 전야제와 개막식전에 참가하기 위해 강의를 빠져야 하는 제자들이 ‘선생님, 저 몇 번째 줄에 있을 거니까 꼭 보세요’ 하는 말을 잊지 않으며 연습장으로 향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역사적인 매듭’을 엮는가 싶었다.
▼가슴 벅찬 지구촌 축제▼
그리고 지난주 일요일 프랑스와의 평가전이 열리던 날 수원에서 경기를 관람하고 서울로 돌아오며 나는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두려움’을 느꼈다. 벅찬 기쁨이 주는 두려움이었다. 전반전이 끝나고, 성난 파도와 같던 응원전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시간,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 팀을 2:1로 이기고 있다는 꿈같은 현실을 실감하고 있는 관중의 그 웃음 가득했던 표정에 일렁이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도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회복이었다. 단순한 자신감이 아니라 그 자신감의 ‘회복’이었다.
그동안 무슨무슨 게이트에 시달릴 대로 시달리면서 얼마나 찌들어 살았던가. 그것은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하는 절망감에 가까운 나날들이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휘몰아쳤던 교육, 의료, 재벌, 언론… 그리고 남북관계에 이르기까지 실로 우리는 지칠 대로 지치고 찌들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앞 도로를 탱크가 무리를 지어 달려가는 것을 바라보며 5·16을 겪은 이후 나는 어쩌면 이토록 국민과 정부가 유리된 채 저마다 편가르기에 빠져 있었던 기억이 없다. 그런 찌듦에서 한 순간에 훌쩍 벗어나는 것 같은 환희가 후반전을 기다리는 내내 경기장 안에 가득했다.
붉은 응원복 티셔츠를 긴 와이셔츠 위에 껴입어서 마치 야구선수 같은 모습을 한 채,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한국팀 맞아?”라고 중얼거리던 흰 머리카락의 50대 팬의 그 여유 있는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이런 얼굴들을 만나는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생전 그의 불후의 작품 ‘노인과 바다’를 구상했다고 알려진 쿠바의 코지마 포구. 여기에 라 테라자라고 하는 레스토랑이 있다.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고 알려진 이곳 입구에는 이런 말이 써 있다. ‘일상이 전설이 되었다(Ordinary thing became a legend).’
이제 월드컵이 열린다. 우리는 지금 전설을 만들고 있다는 벅찬 기쁨이 여기에는 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월드컵이 단순한 세계인의 축구 잔치로 끝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유구한 고유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문화 월드컵을, 자연친화적인 조화로운 삶을 꿈꾸는 환경 월드컵을, 그리고 선진 정보기술이 뒷받침되는 정보 월드컵을 준비해 왔다.
그 경제적 효과를 몇조원이라고 계산하는 일은 또 얼마나 부질없어 보였던가. 경기장을 짓는 막대한 돈으로 도서관을 짓는다면? 다른 문화시설을 늘리고 복지정책에 투입한다면? 온갖 생각이 누구에겐들 왜 없었을까. 가시적인 것에 너무 많은 힘과 재원을 쏟아붓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는 축제 전야의 고요함 속에서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 최근의 대표팀 평가전이 국민의 얼굴에 미소를 돌아오게 한 것과 같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자긍심이 남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처럼, 월드컵만 잘 되면 ‘다른 건 다 깽판 쳐도 좋다’는 생각만은 금물이다. 그리고 우리의 성숙도가 이런 ‘깽판’을 용납하지도 않는다.
▼´인류의 잣대´를 만들자▼
하나의 스포츠 이벤트를 거대한 인류의 문화축제로 일구어 내는 일을 우리는 지금 해냈다. 그리고 이것이 멀리 우리의 국민정서에 미칠 효과와 영향을 생각하면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 차지 않는가. 바로 이 소중한 의미를 헛되지 않게 오래오래 간직해야 한다. 미래완료가 아닌 현재진행으로.
우리가 해내면 그것이 인류의 잣대가 된다는 엄청난 자부심, 우리는 바로 월드컵 개최를 통해 그것을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이 성취를 통해서 세계 속에서 달라진 우리의 모습을 만날 것이다.
우리가 가는 곳에 길이 생긴다. 그렇게 해서 일상은 어느 날 전설이 되는 것이다. 지구촌의 인류가 놀라고 있다. 한국인이여, 우리가 하면 그것이 인류의 잣대가 된다. 전설이 된다.
한수산 소설가·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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