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16강 안 되면 작은애는 공부 못할 거래. 큰애는 기분 나빠 다 때려치우고 군대 간다고 하고.” ‘지체 높은 분’들은 한술 더 뜬다. “16강이 돼야 시끄러운 얘기 좀 없어져 덕 좀 볼 텐데요.”
온통 ‘16강 이야기’였다. 마치 ‘16강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식이었다.
16강 소리만 들어도 지겨울 때가 있었다. 하지만 생각한다. 그것만큼 국민을 하나 되게 하고 참 희망을 준 말이 또 어디 있었던가.
월드컵의 막은 오르고 연일 ‘총성 없는 전쟁’이 치러지면서 지구촌이 들썩이고 있다.
내일이면 우리의 ‘태극전사’들이 폴란드와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인다. 이어 미국 포르투갈과도 절체절명의 심정으로 맞서야 한다.
어떤 이는 말한다. “폴란드나 미국이 ‘1승 제물’이라고? 아니, 그들은 ‘핫바지’인가. 그들은 우리보다 먼저 월드컵 1승을 이뤘고 16강을 달성했다. 오히려 그들이 한국을 향해 ‘1승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있다”고.
사실 전문가, 도박사들의 평가에서 볼 때 한국이 1승을 장담할 상대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 스포츠에서의 평범한 진리는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없다’는 것이다. 개막전에서 누구나가 이긴다고 했던 전 대회 우승팀인 세계 랭킹 1위 프랑스가 한국보다 두 계단 아래인 랭킹 42위의 월드컵 첫 출전국 세네갈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는가.
“꿈같지만 우리의 승리는 결코 기적이 아니다. 우리는 프랑스와 첫 경기에서 맞붙게 돼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우리는 부단한 노력을 했고 그것이 결과로 나왔을 뿐이다.” 브뤼노 메추 세네갈 감독은 말했다.
패한 프랑스의 로제 르메르 감독 얘기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기 전까지만 해도 세네갈은 우리에게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휘슬이 울리자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아주 조직적으로 싸웠고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두 감독 말의 포인트는 뭘까. 랭킹의 차이도 아니고 선수의 명성 차이도 아니었다. 바로 제대로 준비한 팀과 그렇지 못한 팀의 차이였다.
지난 1년6개월간 우리 선수들 정말 많은 땀을 흘렸다. 여기에 네덜란드에서 온 거스 히딩크 감독의 조련이 더해졌다. 그는 “이기지 못할 상대란 없다. 자신을 컨트롤하라. 그리고 그대들의 꿈을 잡아라”며 선수들에게 자신감과 함께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 결과 비록 평가전이지만 스코틀랜드를 이기고, 잉글랜드와 비기고, 프랑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리고 지금 결전을 기다리고 있다.
1954년 스위스대회 첫 출전 후 5번의 월드컵에서 14전4무10패, 단 1승도 못 거둔 한국축구. 그 ‘한’을 내지르기 위해 약육강식의 논리가 에누리 없이 적용되는 정글에 홀연히 던져진 우리 선수들이다. 온 국민이 ‘16강’을 원한다. 그렇다면 모두 나서자. 국민적 염원을 담아 우리 전사들을 성원하자.
그리고 생각하자. 그들의 땀과 열정을 확인한 지금 비록 16강 열망에 부합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겨누지 말자.
이재권 스포츠레저부장 kwon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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