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4700만 국민은 경기장, 거리, 극장, 그리고 가정에서 모두 한 목소리로 ‘코리아 파이팅’을 외쳤고 모두가 하나 되어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날의 감동에는 여와 야, 노와 사, 남과 여, 노와 소, 부자와 빈자가 따로 없었다. 너와 나는 하나였고, 온 국민은 ‘우리’라는 공동체로 결속되었다.
단군 이래 사실상 처음으로 온 국민이 함께 부둥켜안고 기뻐하는 이런 엄청난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먼저 축구라는 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넓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축구는 매우 격렬한 경기다. 한 골을 만드는 데는 많은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런 기다림 끝에 뛰어난 전술과 개인기가 결합되어 만들어내는 한골 한골은 마치 포탄이 작렬하듯 폭발적인 감흥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관행 벗고 끝없는 변신▼
이러한 특성 외에 거스 히딩크 사단이 보여준 치밀한 준비과정이 우리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미 많이 지적된 것처럼 나는 히딩크 사단이 연출해낸 이번의 좋은 성적을 서구적 합리주의와 한국적 다이내미즘이 잘 결합된 성공 사례라고 생각한다.
최근의 동아일보 분석에 의하면 히딩크가 한국 대표팀의 감독이 된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은 한국팀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뒤 그는 선수들의 체력과 정신력 등 기본기 강화, 연고주의 배격, 능력에 따른 선수 선발 등 원칙에 입각한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그는 유동 포메이션과 토털 사커 등 새로운 전술을 도입하여 끊임없이 우리 선수들을 훈련시켰고, 선수들은 사막에서 횃불을 밝혀놓고 공사를 하던 한국인답게 무한 에너지를 발휘하여 그러한 지도에 부응하였다고 한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팀은 새로운 지식의 습득을 통해 끊임없이 변신을 추구하는 ‘학습조직’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달리 보면 엄격한 법규·계서제·관행·전례를 중시하는 관료제를 타파하고 목표와 비전, 자율성과 전문성, 그리고 대대적인 인센티브를 통해 성과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고성과 조직’의 전형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다. 히딩크 감독이 한 일은 바로 한국 축구팀을 학습조직과 고성과조직으로 탈바꿈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조금만 옆으로 눈길을 돌리면 히딩크 감독이 추구한 학습조직 고성과조직의 이상은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세계가 인정하고 있듯이 한국은 반도체, 초박막트랜지스터액정표시장치(TFT-LCD), 휴대전화, 디지털 TV, 인터넷, 게임, 자동차, 조선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 초일류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나라다. 우리의 문화계도 임권택과 같은 걸출한 감독을 배출시키고 월드컵 전야제와 개막제에서 보는 것처럼 세계가 격찬하는 문화축제를 연출하는 능력이 있다.
이렇듯 한국 사회의 여러 분야는 모두 학습조직과 고성과조직으로의 변신을 통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고,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준비를 해나가고 있다. 바로 이것이 4년 전 우리가 겪었던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그런데 문제는 유독 한국의 정치권만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축구팀과 사회의 각 영역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도약하고 있는데도 한국의 정치권은 예나 지금이나 헐뜯고 싸우며 국민을 분열시키는 데 빠져 있는 것이다.
▼정치도 리더십 보여주길▼
그러나 한국 축구팀이 일궈낸 6월 4일의 감동의 드라마를 계기로 한국의 정치가 다시는 국가 발전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합의가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국민적 합의에 응답하기 위해 정치권은 스스로 학습조직과 고성과조직으로 탈바꿈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을 확실하게 선진국으로 진입시킬 수 있는 비전과 전략을 제시해야만 할 것이다.
월드컵의 와중에 실시될 지방선거와 연말의 대통령선거에서는 차기 지도자들이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을 능가하는 뛰어난 정치리더십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 축구를 한 단계 도약시킨 것처럼 한국사회 전체를 선진국의 반열에 진입시키기 위한 놀라운 국가기획을 선보이길 갈망한다. 이것이 이번 월드컵 승리를 계기로 하나로 결속된 온 국민이 원하는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다.
성경륭 한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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