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60%를 넘는 유권자들이 누구에게 투표해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는 소식이다. 이는 약 한 달 전의 조사에 나타난 결과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투표일이 가까워질수록 결심 투표자 수가 증가하는 과거의 추세와 비교해 볼 때 이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당연히 투표율도 크게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적절한 후보자 없을때 기표▼
지방자치의 선진국이라는 구미의 여러 나라에서도 지방정부 선거는 일반적으로 낮은 투표율을 보여준다. 투표 결과에 따라 한 나라의 집권세력이 교체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자치정부의 정책 프로그램이 크게 바뀔 만큼 지방정부의 역할 범위가 넓은 것도 아니라는 점을 유권자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자치정부의 수장을 그의 정치철학이나 가치관이 아니라 관리자의 경영능력에 대한 평가에 따라 선출해야 한다면, 그렇게 해서 뽑히는 단체장이 누가 되든 유권자의 일상에 미치는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지방선거 외면 현상은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우선 현상적으로는 월드컵 개최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축구 경기에 열광한 나머지 지방선거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드컵이 개막되기 전부터 부동표가 60%대를 형성해 왔다는 사실은 이를 단순히 월드컵 탓만으로 돌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웅변해 주고 있다. 아무래도 더욱 근원적으로는 좌우를 둘러봐도 도무지 마음에 드는 선택 대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지방자치 선거라고 하면서 중앙정치의 대리인 역할을 자임하는 후보들이 선거를 과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토호세력이나 유지들과 유착해서 지역정치를 배타적으로 장악할 것이 뻔한 인물들이 후보군을 이루고 있을 때 누구를 뽑아야 할지 도무지 마음 가는 데가 없을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구태 정치를 답습하는 기성 정당이 선거의 주도권을 쥐고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새 인물을 뽑아 봤자 구식 정치의 확대 재생산 외에 그것이 따로 기여할 바가 뭐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방선거가 대통령선거의 전초전처럼 변질되면서 이런 결과를 유도하는 구태 정치에 식상하고 절망했을 법한 일이기도 하다.
개혁과 변화에 대한 열망이 굴뚝 같은 데 이에 대한 대안 제시는 없고 온통 서로 헐뜯고 비방하거나 허황된 사탕발림만 늘어놓는다고 할 때 뉘라서 투표장에 나가 ‘이 사람이 앞으로 4년간 내 대신 일할 사람이오’ 하고 손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겠는가. 그런 점에서 지금의 지방선거 외면 현상은 기성 정치에 대한 국민 저항의 소극적 표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 투표율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투표 참여를 독려한다면 이는 자유투표 정신을 훼손하는 일종의 강제투표 권장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의미에서 공직 선출권의 자유로운 행사가 구속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먼저 의식한 나라에서는 투표지에 후보로 등록한 인물 외에도 공란을 따로 두어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없는 유권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그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주고 있다. 단순히 의사표현을 거부하는 기권표와 의사표시의 욕구는 있지만 적절한 후보자를 발견하지 못해 투표 참여를 기피하는 유권자를 구별해서 다루자는 것이다.
▼유권자 투표참여 효과 커▼
이런 공란 투표제는 공란에 기표한 유권자가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을 넘을 경우 재선거를 치르도록 규정함으로써 기성 정치권의 변화와 개혁을 제도적으로 유인하는 성과를 기대해 볼 수도 있게 한다. 캐나다의 경우가 대표적 사례다.
개혁과 변화를 기다리다 지쳐 현실정치 혐오증을 앓고 있는 유권자들에게 무조건 투표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공란 투표제라도 도입해 유권자 참여를 유도하는 더욱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겠다.
그래야 기표소로 향하는 유권자들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질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유권자가 주인으로 대접받는 유일한 공간이 선거라면 바로 그 선거의 의미를 더욱 더 정확히 살려내야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박재창 숙명여대 교수·의회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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