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하고 싶은데 왜 참지 않으면 안되는가, 섹스와 관련하여 남자와 여자는 왜 이다지도 다른가, 남자는 왜 여자를 강간하고 싶어하는 걸까, 어떤 여자들(매춘부)은 하고 싶지 않아도 날마다 수십번이나 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다른 여자들(미혼의 처녀들)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이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현실은 왜 존재하는가, 결혼이란 무엇일까, 사랑과 성은 어떤 관계일까, 사람들은 왜 임신중절, 동성애, 마스터베이션, 불륜, 이혼, 성도착 등을 부정적으로 바라볼까….
성에 관한 상투적인 담론들이 지배하는 한편으로 혼란스러운 성의 폭주가 범람하고 있는 이 시대, 성과 관련한 의문들은 이렇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는 동안, 마음과 육체를 통해 하나가 되고자 하는 남녀의 오래된 갈망은 헛된 시도로 끝나기 십상이다. 알몸이 된 둘은 그러나, 끝내 마음의 옷을 벗지 못한 채 하나가 되고 싶다는 불가능한 꿈을 버리지 못한다. 남자가 수많은 여자의 몸을 전전하면서 자신의 정신에 뻥 뚫려 있는 ‘비겁’을 숨기는 동안, 여자는 걷잡을 수 없는 ‘배반’의 계절을 산다. 남자는 여자의 성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여자는 남자의 성을 제대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성(性)은 환상(幻想)에 불과한 것인가?
프로이드 학파의 심리학자로 정신분석학적 기법을 역사, 사회, 집단에 적용하는 문명비평가 일본인 기시다 슈는 이같은 물음에 단연, ‘그렇다’고 주장한다. 그가 ‘성은 환상이다’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인간은 본능이 고장 나 버린 동물이다. 성본능도 고장 나 있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들처럼 본능에 따른 정상적인 섹스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섹스 없이는 인류가 멸망할 것이므로, 인간은 여러 가지 환상 장치를 고안해 내 이런 불능을 극복하고자 했다. 섹스에 있어 남자는 능동적이고 여자는 수동적이라는 관점도 이런 환상 장치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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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주장을 전제로 저자는 성욕의 심리학적 기원, 인간의 기본적인 성적 불능을 출발점으로 하는 남녀 관계의 역사적 배경과 변천, 성차별의 기원, 강간이나 매춘등 다른 동물에게 없는 현상이 인간에게만 있는 이유, 서구의 성문화와 기독교의 관계등등을 종횡무진한다. 무게가 있으면 어렵거나, 쉬우면 천박한 ‘섹스’ 관련 책들이 범람하는 상황에서 저자의 언어는 쉽고 깊다. 성의 인문학적 접근으로 이만한 책이 드물다는 찬사를 아끼고 싶지 않을 정도다.
이 책의 백미는 자본주의와 남녀의 성욕을 연결시킨 시각이다.
“여자에게 성욕이 없다, 혹은 여자는 참아야 한다는 것은 근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환상이다. 그것은 섹스의 가격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여자도 자유롭게 섹스하고 싶은 존재라고 한다면, 남자만 굳이 섹스에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어진다. 근대의 남자들은 비싼 돈을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성(性)이라고 여겨 여자를 얻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려고 열심히 노동했으며 그 결과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적 인간이란, 남자에 관해 말하자면, 여자와 연애와 섹스를 위해 기꺼이 자발적으로 노예처럼 노동하는 인간을 가리킨다.”
이 과정에서 남자는 돈을 벌어야 했고, 여자는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 성욕 따위는 있을 턱이 없다는 시늉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다. ‘나이 어린 처녀’가 신품(新品)으로 사랑받고, ‘청순 가련형의 여자가 사랑받는다’는 것은 여기서 나타난 환상이다.
“근대의 남녀관계는 조금이라도 싸게 사려고 값을 깎는, 혹은 잘만 하면 돈도 내지 않고 사기 쳐 빼앗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손님(남자)과, 조금이라도 비싸게 매겨 팔려고 볼썽사납게 계산하는 장사꾼(여자)과의 관계 그 자체였다. 여자는 성을 파는 장사꾼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현실을 깨닫지 못한 채 사랑의 환상에 정신을 잃고 남자를 믿는 여자, 사람을 쉽게 좋아하는 여자, 신의를 다하면 반드시 보답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는 불가피하게 배반당하곤 했다.”
그러나 이같은 상황이 현대에 들어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가 실현됨으로써 바뀌어 졌다. 근면과 절약을 통한 끊임없는 자본축적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고 여자들도 경제력을 가지면서 자본주의 정신을 뒷받침하던 엄격한 금욕적 성도덕이 존재이유를 잃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성해방과 성혁명이 일어났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만난 남녀 여학생이 동침을 한다든가, 프리섹스를 한다며 어느 누구하고라도 곧바로 잠자리를 함께 하는 여성이 있는 가 하면, 난교파티 스와핑(부부교환) 클럽이 있다든가 하는 소리들이 여기 저기서 들려오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옛날에 비해 가장 큰 차이는 여자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섹스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음란한 여성이라 비난받던 여성은 ‘정열적인 여자’로 바뀌었고 재미없는 섹스는 여자들도 억지로 하지 않는다. 재미없는 섹스를 하는 남자따위는 버리면 그만이다.
남자쪽도 달라졌다. 현대의 젊은 남자들은 옛날 남자들처럼 섹스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성적 불능이 증가하게 된 것이다. 이제 섹스는 단지 취미의 일종이 되었다.
섹스를 하지 않는 부부들이 출현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 섹스없이도 생식을 가능하게 만든 테크놀로지가 발전되고 성욕과는 별개로 남자의 발기를 가능하게 하는 비아그라등이 발명되면서, 종래의 성차별적 환상 장치는 근본적으로 해체되고 있다.
저자는 이처럼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성관념이 시대와 문화적 상황에서 나온 것이므로 언제든 변할 수 있는 ‘환(幻)’이라고 강조한다.
기시다 슈는 일본내에서 ‘사적 유환론(史的唯幻論·인간은 본능이 고장난 동물이며, 그런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국가 사회 가족 성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냈다는 주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학자다. 그는 국가, 사회, 종교, 가족, 성등 모든 것이 인간이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만들어 내고 조작해 낸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가족은 성과 육아와 혈연 존속등의 욕구를 틀 짓는 공동환상이고 일본은 일본인이라는 혈연적 환상에 기반을 둔 유사 가족적인 공동 환상일 뿐이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도 인디언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해 낸 공동 환상이다. 성 또한 마찬가지다.
자! 그렇다면, 삶은, 성은 무의미한 것인가?
저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낸다.
“언어, 과학, 지식, 세계관, 자아관념, 경험, 과거, 뉴스, 현실등 모든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무가치하다거나 무의미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은 환상없이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문제는, 그런 환상이 오류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는 하나의 사회 규범으로서 얼마만큼 적합성을 가지느냐 하는 데에 있다. 만일 어떤 환상이 그런 적합성을 상실한다면, 그런 환상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역사적으로 습득한 성관념들은 오늘날 그 적합성을 상실한 환상이므로 그것역시, 새로운 환상에게 자리를 내 줘야 한다.
과연, 그렇다면 그 환상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