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호기 시인의 새 시집 ‘수련’은 그가 기왕에 몸을 주제로 삼아 노래했던 시집들의 연장선에 있다. 그는 육체가 지닌 힘의 파동과 때로는 폭력에까지 이르는 격렬하고 미묘한 관능에 관해 늘 말해 왔다. 그가 그리는 우리의 몸이 종종 기괴한 양상을 띠는 것은 덮개없는 육체를 그가 보고 있기 때문이다. 덮개가 모두 사라진 자동차를 생각해보라. 거기에는 기름통이 있고 엔진이 있고 각종 동력전달장치가 있다. 그러나 자동차를 모는 사람에게 그 장치들은 가려져 있기에 그는 오직 운전대와 계기판을 대면할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자 인터페이스라고 부른다. 기계가 덮개를 벗어버리고 나면, 자동차건 발전기건 세탁기건 별로 다를 바 없는 것처럼, 인간의 육체도 이목구비같은 상부 인터페이스를 비롯해 각층의 인터페이스를 차례로 벗고 나면 기초 생명체의 그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채호기식 육체의 기괴함은 우리 육체 속에 담긴 동물성과 식물성의 낯선 모습이자 그 고통과 기쁨이다.
이 기괴함은 해부학적이지만, 분석효과보다 통합효과에 이를 때가 더 많다. 육체의 덮개 아래로 내려가기는 어떤 역진화의 길을 따라가는 것처럼 각단계에서마다 더 많은 생명체와 만나고 더 큰 생명의 욕망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생명의 이 기초 욕망이 각급 인터페이스를 젖혀두고, 상부 인터페이스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어왔던 사랑·슬픔·용기같은 고도의 생명효과와 직접 만날 때의 기쁨과 고통은 손톱과 머리카락이 뇌수의 사고기능을 얻기라도 한 것 같은 이상한 전율을 만들어낸다. 이 전율이 채호기가 자주 만나고 노리는 시적상태이다.
새 시집에서 시인은 그 시적상태의 표징을 한 꽃의 개화에서 발견한다. 수련은 물론 일체 존재의 대통합을 나타내는 화엄의 꽃이다. 그러나 채호기의 수련은 저 화엄의 관념적 상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현상이며 전개과정이다.
‘잠자는 수련을 응시하는 물’에서처럼 그에게 이 수련은 일체 존재가 본래 지녔을 구체적 성질이기에 ‘수련은 여전히 밤과 같은 무채색이고/물은 생기다 만 새벽의 색채로 그녀를 응시한다’. 수련은 생명력의 전개과정이 저 자신을 문득 느끼면서 피워내는 꽃이다. ‘어느날 문득’에서 시인은 자전거를 타고 수련을 보러 가다가 패달을 밟는 다리의 근육과 대동맥을 통과하는 피의 속도를 느끼는 순간 ‘내 정신 속에는 이미,/수련이 꽃잎을 펼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수련은 생명이 저를 확인하는 기쁨이다.
그러나 수련은 고요한 꽃이다. 이른 아침에 물 위에 고요히 핀 수련을 보려 갈 때 우리는 가슴의 고동이 느려지고 마음이 평정상태에 이르러 육체의 긴장이 가장 낮아지는 체험을 거기 기대할 것이다. 그때에도 우리는 이 순간이 시간에서 완전히 벗어난 영원과는 달리 또다시 무슨 일이 일어날 시간의 일부임을 알고 있다. 생명은 그 모든 소란과 준동을 함께 끌어안을 때 평온하다. ‘그 모든 세계를 닦는 흰 수건처럼 피어’ 있는 채호기의 수련은 생명의 온갖 준동들이 긴 시간과 막막한 공간에서 서로를 비춰주고 서로의 생성을 교환하는 소란 속의 평온이다. 채호기의 ‘수련’은 자연을 분석하는 지식의 시선과 통합하여 보려는 슬기의 시선을 그 나름대로 아우르는 지점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집이다.
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septuor@hananet.net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