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칼럼]이종교배와 시민사회

  • 입력 2002년 6월 22일 19시 21분


거스 히딩크 감독처럼 외국인이 온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는 것은 한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이는 유럽 축구의 진수를 한국 축구에 접목시켜 팀의 수준을 급격히 향상시키는 ‘비정상’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대단히 성공적인 ‘이종교배’다.

문화계에서 한창 유행중인 ‘퓨전(fusion)’이 다양한 요소에 의한 ‘뒤섞음’의 미학에 기대고 있다면, ‘이종교배’는 철저히 우성인자와 열성인자를 가려내 ‘선별적’ 결합을 시도한다.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어떡하느냐고? 사실 오랜 세월 동안 강대국들 틈에서 생존을 위한 무기로 ‘배타적 민족주의’를 갈고 닦아 온 한국인들이 이종교배를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한국대표팀에는 아직도 타국 출신 선수가 없다.

그러나 요즘 한국축구를 보면 그런 걱정은 접어도 될 듯하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축구를 향상시킨 결정적 요인은 기초체력 강화, 실력에 의한 엄정한 평가, 규율의 엄수 등 글로벌 스탠더드를 한국축구에 엄격히 적용했다는 것이다. 한국 선수들은 이미 이런 요구에 응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의 ‘만남’은 성공적 결과로 나타났다.

한국의 ‘온 국민 응원단’ 역시 그런 ‘행복한 만남’의 결과다. 대규모 민주화운동의 경험에 유럽과 일본의 열정적 응원문화가 결합된 이것은 정치인들이 당혹스러워할 정도로 어떤 이데올로기의 개입도 용납하지 않는 순수한 열정과 절제된 이성의 군집으로 나타났다. 약 50만명이 모였던 세종로 사거리를 경기 종료 1시간 만에 깔끔히 정돈해내는 힘. 한국인은 이제 그런 광기와 이성의 조화를 누릴 줄 안다.

민주시민 의식이 강한 듯하면서도 결정적 순간 혈연 지연 학연과 흑백논리에 매몰되고 말았던 ‘시민 없는 시민사회’의 현실에 고민해 온 한국사회. 이제 우리는 4강, 우승보다 더 큰 꿈을 꿀 때다. ‘이종교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정치적 민주화 단계를 넘어 ‘시민 있는 세계시민사회’로 가는 꿈.

김형찬 문화부기자(철학박사)khc@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