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물결에 떠밀려 가듯, 당연히 오후 강의는 휴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의할까?”하는 내 농담에 “민족의 반역자가 되려면 무엇을 못 하시겠어요” 하고 한 녀석이 웅얼거렸다. 오후 3시가 되자, 비가 부슬거리는 교정은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술대학과 좁은 샛길을 사이에 하고 있는 내 연구실은 종일 학생들의 재잘거림으로 가득했는데, 그 순간은 소리의 암묵(暗默)이었다.
▼열정으로 무장한 4강세대▼
3000여명은 될까. 3층까지 발 디딜 틈도 없이 학생들로 들어찬 대강당 ‘대양홀’, 등에서 땀이 흘렀다. 그 속에 비집고 앉아 “대한민국”을 함께 외치며 나는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가 달라지고 있구나. 축구팀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양태가, 적어도 예전과는 너무 달랐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존경할 만한 위대한 선수로서 그들을 보지 않았다. 선수들에 대한 친화력이 달랐다. 선수들은 오빠였고 형이었고 ‘쟤’였다. 무엇보다도 끈끈하게 선수들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결전의 날, 독일과의 준결승을 기다리던 그 시간이 멈춰버릴 것만 같던 스탠드에서 ‘붉은 악마’들이 몸으로 써 보인 것은, 그랬다, 꿈처럼 아름다운 말이었다. 더 무엇을 소리쳐 내세우고, 더 무엇을 목말라 그리워하랴. 부드러운 속삭임처럼 다가온 그 말. ‘꿈★은 이루어진다.’
그것은 의외로 한글이었다. 전 세계의 한민족이 함께 느끼게 하자는 마음에서 우리의 문화적 자긍심을 드높이고자 한글을 택했다니, 이 젊은이들의 마음이 또 얼마나 가상한가. 모든 것은 그들이 써낸 말과 다르지 않았다. 꿈처럼 이루어졌다. 16강. 8강. 그리고 감격의 4강! 꿈은 이루어진다!
내 젊은 시절, 시사영어 강의실에서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 ‘I have a dream(나에겐 꿈이 있다)’을 읽던 그때 나에게는 무슨 꿈이 있었던가. 군부독재와 유신의 질곡, 최루탄에 가려 보이지 않던 민주화, 툭하면 대학의 문을 닫던 강압 통치…. 친구들은 감옥으로 병영으로 끌려갔다. 꿈은 그렇게 가려졌고, ‘잘살아 보자’라는 구호 아래, 나는 점점 더 작아졌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체감하고 있는 것은 ‘월드컵 세대’라는, 젊은 열정으로 무장한 젊은 영혼들의 위대한 탄생이다. ‘4강 세대’, ‘붉은 악마 세대’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그 속에는 우리의 젊은 여성들이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이들의 정서와 꿈과 가능성은 미래완료가 아니다. 전 국민적인 것으로 녹여내야 하는 현재진행형의 어젠더를 젊은이들은 우리 앞에 펼쳐 보였다.
월드컵을 통해 표출된 이 땅의 젊은이와 여성, 그들이 이 자신감으로, 이 가능성으로, 이터질 듯한 가슴으로 껴안을 행복의 문양을 위해 우리는 그 ‘틀과 터’를 만들어야 한다. 그들의 발목을 잡는 낡은 것들, 썩은 것들, 과거완료여, 가라. 히딩크 감독은 말했었다. “내가 선택한 길은 옳았고, 계속 나의 길을 가겠다.” 바로 이 자신감이다. 세계 4강. 축구가 먼저 그 가능성을 열었을 뿐이다. “졌지만 독일에 뒤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송종국 선수도 말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집의 TV를 두고 거리로 내달렸는가. 그것은 공동체가 없이 나 혼자 즐기는 재미는 즐거움이 아니라는, 젊은이들이 보여준 열린 가슴의 어깨동무였다. 함께 꿈꾸어 보자. 하나됨과 나눔을. 그것은 무엇보다도 남북의 갈등, 동서의 갈등, 계층의 갈등을 허무는 ‘하나됨’일 것이다. 그 속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횡포와 원한의 골을 메우는 ‘나눔’이 어우러져야 하리라. 그렇게 해서 세계와의 하나됨으로 펼쳐나가자. 주눅든 변방의식, “조국!” 하고 불러보면 언제나 암울한 기억들부터 떠오르던 가슴 시린 어두운 과거도 털고 일어나 세계의 주인으로 서자. 딸아 아들아. 무엇이 두려우랴. 너희들은 이미 4강이 아니냐.
▼이제 나눔 하나됨을 꿈꾸자▼
젊은 그대들아. 이 땅의 아들딸들아. 너희는 그렇구나, 고통 속에서도 사랑해야 하는 조국을 구겨진 자존심으로 부여안고, 어금니 물면서 살아야 했던 이 아버지들의 세대와는 다르다. 너희들의 자신감에 가슴이 벅차구나. 너희들이 꿈꾸는 행복에 가슴이 뛰는구나.
이루거라. 너희들의 꿈을. 바로 너희들이 세계를 향해 쓰지 않았느냐.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한수산 소설가·세종대 교수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