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황호택]가난을 이겨낸 영웅들

  • 입력 2002년 7월 1일 18시 56분


거스 히딩크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황선홍은 그리움을 잊기 위해 공을 찼다”고 말했다. 황선홍은 어렸을 때 어머니와 헤어졌고 아버지는 A매치 중에 돌아가셨다. 월드컵 무대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황선홍이 이제 무엇으로 그리움을 견딜지 모르겠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은 유럽과는 달리 축구할 환경이 좋지 않아 국가대표 선수들의 부모 중에는 노동을 하는 사람이 많다. 다들 불우하고 힘들게 자랐다”며 연민의 감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역경 좌절 그리고 축구▼

설기현의 어머니는 탄광에서 남편을 잃고 셋집을 전전하며 4형제를 키웠다. 김남일은 아버지로부터 “너만은 막노동꾼이 돼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안정환도 귀공자풍의 인상과는 달리 홀어머니가 꾸리는 밑바닥 생활을 체험하며 헝그리 정신을 길렀다. 아버지가 공사판에서 노동을 하고 어머니가 식당일을 하는 이영표는 가난이 싫어 축구를 시작했다. 이천수는 아버지의 실직으로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궁핍했다. 이을용은 한때 좌절해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 생활을 했다. 박지성은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더라면 힘든 운동을 쉽게 포기했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털어놓는다.

골프 스키 수영 테니스 등 인기 종목의 스포츠 선수로 대성하려면 어느 정도 부모의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골프 클럽을 구입하는 데 200만∼300만원이 들고 한 달에 그린피와 교습비로 수백만원을 쓴다. 겨울철에는 태국이나 호주로 전지훈련을 가야 한다.

귀족 스포츠와 달리 축구는 고가의 장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잔디가 양탄자처럼 깔린 경기장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적인 스타들 중에는 브라질의 빈민가나 아프리카의 오두막집에서 태어나 맨발로 흙바닥에서 공을 차며 청소년 시절을 보낸 선수들이 많다.

홍명보의 저서 ‘영원한 리베로’에는 어린 시절 축구를 못하게 말리던 부모와 교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홍명보는 그래도 가정환경이 괜찮은 편이었다. 부모는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왜 험한 운동을 하려고 하니”라며 말렸고 중학교 담임교사가 집에 찾아와 공부에 전념하라고 설득했다. 월드컵 4강 진출과 함께 홍명보는 국민적 영웅이 되면서 평범한 봉급쟁이가 평생 벌어야 할 돈을 포상금으로 받았다.

수십억 관중을 확보하고 있는 축구는 거대한 산업이 됐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전 세계적으로 축구산업이 2160억달러 규모라고 추산했다. 유럽 구단들은 관중의 이목을 끄는 스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는다. 공만 잘 차면 젊은 나이에 돈과 명성을 함께 누릴 수 있다.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 구단은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 선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이적료로 6450만달러를 지불했다. 지단은 세금을 떼고 난 후의 소득이 주당 15만달러(약 1억8000만원)를 넘는다.

마이클 조던, 타이거 우즈 등 세계적인 스타들을 새삼 거론할 것도 없겠지만 우리의 박찬호 박세리 선수도 젊은 나이에 부와 명성을 함께 차지했다. 공부가 이 세상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아이들을 닦달하고 운동하는 아이들을 낮춰보는 사회적 인식이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은 운동 못하는 아이들이 공부나 해야 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스포츠 스타들이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경제논리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가치가 크더라도 공기처럼 흔한 것은 공짜이고 반대로 실용성은 작지만 대중의 인기가 높은 귀한 재화와 재능은 높은 가격을 쳐준다.

월드컵에 국민의 사기, 국가의 자존심이 걸려 있다 보니 좋은 성적을 낸 선수들은 국민적 영웅이 된다. 월드컵에서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와 싸워 이길 수 있다. 국가적으로 어려움에 빠진 나라들은 국민에게 뭔가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수단으로 축구를 활용한다.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제국들은 축구를 통해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려고 한다. 세계 각국이 이렇게 축구 전쟁에 열을 올리는 바람에 월드컵을 뛴 선수들에게 병역 혜택을 주어도 별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움과 설움 허공속으로▼

축구는 민주주의 이념에 가장 충실한 스포츠다. 축구경기장에서는 연줄이나 집안 배경이 필요 없다. 그라운드는 능력에 따른 평등 세상이다.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공 잘 차는 사람이 인정을 받는다. 축구는 공과 함께 그리움과 설움을 허공으로 날려버리는 스포츠이다.

황선홍 박지성 설기현 안정환 김남일 이영표 이을용 이천수는 가난과 그리움을 이겨낸 그라운드의 영웅들이다. 번듯한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했고 좋은 학교에 다니지 못한다는 이유로 좌절하기 쉬운 청소년들에게 훌륭한 역할 모델을 제공했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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