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대표팀이 서울에서 독일과 결승 진출을 놓고 다투던 지난달 25일 저녁, 그는 일본 도쿄(東京) 국립경기장에 있었다. 그 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그러나 경기장에는 6000여명의 한국인 서포터스가 모여 붉은 셔츠를 입고 일사불란하게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었다. 경기장에 있는 대형 전광판을 보면서 응원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평범한 일본인이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다”고 하는 그는 바바 다카코(馬場貴子·23·여). 니가타(新潟)현 산조(三)시 출신으로 3월에 요코하마(橫濱)의 가나가와(神奈川)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5년 전 요코하마에 와 오빠(26)와 함께 살고 있다.
그는 한국팀의 경기 중에서는 이탈리아전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고 말했다. “일본팀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닭살이 돋을 정도로 감동했다”는 것. “한국이 이번에 힘을 냈다는 것이 기쁘다. 한국팀이 이기면 기쁘고 지면 가슴이 아프다”고 덧붙였다.
그런 마음이 그를 국립경기장의 ‘붉은 악마’속으로 향하게 했다.
도쿄 신바시(新橋)역에서 경기장으로 가는 택시 속에 이미 ‘한국’은 합승하고 있었다. 운전사는 말했다. “한국을 응원하러 갑니까. 일본 사람들도 대부분 한국을 응원할 겁니다. 한국-독일전을 보러 들어갔는지 손님이 많이 줄었어요. 한국이 이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붉은 악마’들과 자리를 함께하자 ‘별세계’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포터스의 열기와 일체감이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일본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한국인 서포터스 속에 섞여 있던 일본의 젊은이들이 “대∼한민국”과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는 것을 보며 그는 왠지 마음이 푸근해졌다.
다음날 오전은 아르바이트가 있는 날이다. 그는 집에서 자전거로 5분쯤 걸리는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에서 1주일에 사흘 일한다. 얼마 전까지는 대형 편의점인 로손에서 일했는데 영화를 너무 좋아해 이곳으로 옮겼다. 점원에게는 무료로 비디오를 빌려주기 때문이다.
그가 일하는 비디오 대여점에도 ‘한국영화 코너’가 있다. 역시 ‘쉬리’가 가장 인기다. 그도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칼’을 봤다. 아직도 ‘8월의 크리스마스’를 못 본 것이 아쉽다. ‘친구’와 ‘KT’도 보고 싶다.
그는 고교 2학년 때인 95년 한국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부산과 서울에서 며칠을 보냈는데 솔직히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그저 인솔교사가 오라면 따라가고 놀아라고 하면 친구들과 장난치고 즐겼을 뿐이다. 기념품으로 김치와 김을 산 것이 그나마 기억에 남는다. 한국은 그저 관광지 중의 한 곳이었을 뿐이다.
그가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 3학년 때였다. 그가 속해 있던 학습서클(제미)의 담당 교수가 국제학습의 일환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을 때 그는 거의 충격을 받았다. ‘이런 슬프고 야만적인 과거사가 양국사이에 숨어있었단 말인가….’
그는 2000년 5월 고교생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으로 한국을 다시 찾았다. 군위안부 할머니들이 살고 있는 ‘나눔의 집’도 방문했다. 서클 학생 10여명이 동행했다. 여행비용 15만엔은 각자 아르바이트로 모았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환영해 준 할머니들도 있었지만 일본인들이 왔다고 해서 방밖으로 나오지 않는 할머니들도 있었습니다. 할머니들이 일본어로 말을 걸어주는 것이 오히려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는 한국을 방문하기 한달 전 군위안부였던 김윤심(金允心·73) 할머니가 도쿄에 와 강연했을 때 친구와 함께 꽃다발을 건넨 적도 있다.
‘나눔의 집’에서 이틀을 보낸 그는 일본에서 한 한국인을 통해 소개받았던 B씨(35)를 만났다. 그는 B씨에게 엉뚱하게 개고기를 먹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평소 ‘이번에 한국에 가면 반드시 개고기를 먹어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맛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뭐랄까, 가장 한국적인 것에 접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회고다.
그날 저녁 그는 B씨 집에서 잤다. “잘 곳이 마땅찮으면 우리 집에서 자라”는 B씨의 말에 따라갔더니 B씨의 부인은 물론 언니와 동생까지 나와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한국 사람들의 인정(人情)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고 느꼈다. 소박하고 따뜻한 한국의 가정 분위기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는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포츠신문을 하나 샀다. 1면에는 어제 자신이 응원했던 한국 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한국 선수들이 서포터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사진을 배경으로 “독일에 0-1, 힘이 떨어졌다. 아시아의 자랑 한국-3위 결정전 전력. ‘붉은 기적’ 대회의 주역 마침내…. 세계를 놀라게 한 스태미나, 정신력 그리고 서포터”라는 글자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아시아의 자랑’이라는 제목이 가슴에 와 닿았다.
한국은 이미 친구들 사이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다. 대학 동창들과 만나거나 e메일을 통해 얘기를 나눌 때도 한국팀은 화제다. 주로 “한국은 정말 세다. 그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다”는 얘기가 많다. 안정환과 홍명보의 이름도 알게 됐다.
평소에도 그와 같은 또래의 젊은 여자들 사이에서는 경비 적게 들고, 쇼핑하기 좋고, 음식 맛있고, 때 빼고 예뻐질 수 있는 한국은 종종 화제에 오른다.
그는 그런 식의 여행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에 다녀온 후 TV 채널을 돌리다 한국 얘기가 나오면 자기도 모르게 채널을 고정한다. 김치 담그는 법을 보고 마음속으로 ‘한국에선 김치에 배를 갈아넣기도 하네’라고 말하기도 한다. 쇼 프로그램을 볼 때면 ‘일본의 아이돌(우상·일본의 10대 가수들을 지칭)이 한국에서도 인기구나’라고 생각하며 즐거워한다.
그날 오후에는 긴자(銀座)에서 아저씨뻘 되는 분의 그림전시회를 관람했다. 두어 시간 동안 긴자를 돌아다니다가 저녁은 아카사카(赤坂)의 한국음식점에서 먹었다. 아카사카에는 가로등마다 일장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려 있어 월드컵 공동개최의 분위기가 곧바로 전해져 왔다. 그는 비빔밥과 나물, 오이김치, 구운 김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는 최근에 맛을 들인 삼겹살을 먹었다.
그는 8월에 새 생활을 시작할 계획이다. 전문학교에 다시 들어가 음악의 흐름에 맞는 이미지영상을 만드는 기술을 공부할 생각이다. 수업기간은 8개월. 이 기술로 안정된 직장을 찾을 심산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면 한국에서 같은 일을 하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지금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한국에 가고 싶다.
“모처럼 한국과 인연을 맺었는데 그냥 끝내고 싶지는 않다. 한국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는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오가며 서로를 알게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으로 향하는 자신의 가슴속에 ‘나눔의 집’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는 다시 물었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의 얘기도 기사가 되나요.”
도쿄〓심규선특파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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