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송상용/생명공학법 더이상 미룰순 없다

  • 입력 2002년 7월 2일 19시 20분


몇 해 전 일본에서 열린 국제생명윤리회의에서 한국의 원로 철학자가 인간복제는 안 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스라엘 철학자가 말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흥분할 것 없다. 이제 우리는 변화를 왜 거부할까보다 달라진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얘기해야 한다.” 필자는 이런 체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과기부 법안 못내고 1년 끌어▼

교통사고로 외아들을 잃은 부모에게 생명공학회사 직원이 찾아가 정중히 조의를 표한 뒤 상담을 건넨다. “혹시 아드님 머리카락 하나 뽑아 놓으신 것 있습니까. 바로 만들어 드립니다. 3억원만 내십시오.” 인간복제는 조만간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바람직한지 끝까지 따져 보아야 한다.

생명공학의 폭주는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인간게놈지도가 4년이나 앞당겨 완성되었다. 유전자 진단과 유전자 치료는 ‘멋진 신세계’와 악몽의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 놓는다.이것은 먼 나라의 얘기만은 아니다. 복제소 영롱이와 진이를 만들어낸 한국의 생명공학은 세계 수준이다.

생명공학의 발전을 무조건 거부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1970년대 말 시험관 아기가 태어났을 때 세상의 끝이 온 것처럼 시끄러웠지만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었다. 생명공학은 앞으로도 많은 어려운 문제점을 풀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생명공학이 엄청난 위험도 내포하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유전자조작식품만 해도 그 안전성에 대해 과학자 사회에서도 합의를 보지 못 하고 있는 형편이다.

생명과학기술이 제기한 착잡한 문제들을 검토해 방향을 잡아 주려는 것이 생명윤리다. 생명윤리는 히포크라테스 이전까지 올라가는 역사를 지녔지만 1990년대 이후 갑자기 중요한 분야로 떠올랐다. 우리나라에도 뒤늦게 ‘의료윤리교육학회’(1996), ‘생명윤리학회’(1997)가 생겼고 올해는 임상연구심의기구협의회가 출범했다. 금년 말 ‘아시아 생명윤리회의’를 서울에 유치할 정도로 한국의 생명윤리 연구는 활발하다.

복제양 ‘돌리’의 출현 이후 생명윤리에 대한 관심은 고조되었지만 한국에는 생명윤리 기본법이나 심의기구가 없는 걱정스러운 상태가 지속되었다. 인간복제를 교리로 하는 신흥종교 라엘운동이 들어와 회사를 차린다 해도 어쩔 도리가 없게 되어 있다. 2년 전 과학기술부가 생명윤리자문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었다. 의학자, 생명공학자, 윤리학자, 종교계 및 시민단체 대표들로 이루어진 자문위는 반년 넘게 열띤 토론 끝에 생명윤리기본법안을 만들어냈다. 불가능이라고 생각됐으나 놀라운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그러나 과기부는 이 법안을 국회에 내놓지 못하고 1년을 끌어왔다. 생명공학계의 반발 때문이었던 것 같다. 채영복 장관 취임 후 과기부는 이 문제에 적극성을 띠기 시작했다. 9월 정기국회에 상정을 목표로 법안을 손질하고 있는 과기부는 여론청취를 끝내고 보건복지부와 협의를 하고 있다고 한다.

뜨거운 문제는 인간배아복제이다. 인간개체복제는 안 된다는 것에 세계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연구를 목적으로 한 배아복제는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 생명공학자들의 열망이다. 종교계와 시민단체들은 배아복제가 안전이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다고 주장한다.

보도에 따르면 과기부는 이 민감한 문제를 생명윤리위원회의 논의사항으로 넘기려 하는 듯하다. 윤리위가 사안별로 토론해 결정하기에 배아복제 문제는 너무나 중대하다. 윤리위는 싸움만 하고 결론을 못 내려 마비될 것이 분명하다. 자문위는 격론을 벌인 결과 잉여냉동배아는 한시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는 멋진 타협에 성공했다. 과기부는 이 값진 합의를 받아들여 입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진국 과학정책 교훈삼자▼

생명공학의 발전은 극한상황을 가져왔다. 일단 보수적 입장에서 통제를 하면서 시간을 벌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의 진전을 주시하고 충분한 토론을 거쳐 문제가 없다면 풀 수 있다. 과기부는 유례 없는 생명공학육성법을 만들었고 4500억원이라는 거액을 투자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육성뿐만 아니라 조정(규제)에도 관심을 두는 선진국들의 과학정책을 배웠으면 좋겠다.

송상용 한림대 교수·과학기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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