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속에서 한국적인 것의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은 연극의 공연 현장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탈춤, 인형극, 판소리의 전통과 미학을 연구하는 현장에서도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둬 왔다. 특히 한국연극사를 하나의 일관된 역사와 전통으로 보려는 학문적 노력은 연극인들에게 민족 연극에 대한 긍지를 심어주고, 현재와 미래의 연극을 꾸려 나가는 이정표가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높이 살만한 것이다.
한국연극사 연구는 김재철의 ‘조선연극사’(1939)가 최초로 통사적 기술을 시도했고, 수십 년이 지난 70년대에 와서 이두현이 비교적 풍부한 문헌기록과 고증을 바탕으로 객관성이 확보된 ‘한국연극사’를 저술함으로써 본격화됐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서연호의 ‘한국근대희곡사연구’와 유민영의 ‘한국근대연극사’가 간행돼서 한국연극사 연구의 역량이 눈에 띄게 축적됐다.
그러나 이들 저서가 하나 같이 안고 있는 결점은 연구의 무게를 현대연극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대연극 관련 연구자료가 너무나 부족한 데서 생겨난 불가피한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고대가 부실한 한국연극사를 저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이런 상황에서 이 책은 무엇보다 한국연극사에서 부실한 고대연극 연구의 빈 공간을 채우는 역저라는 의의를 지닌다. 이것은 필자(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학자) 자신이 오랫동안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수많은 고대의 문헌자료 속에서 연극관련 자료를 발굴하고 이를 객관적으로 분석한 데서 얻어진 값진 결과이다. 이런 문헌자료의 발굴과 분석이라는 힘든 작업은 저자의 부친인 사재동 전 충남대 교수로부터 최소한 50여 년에 걸쳐 대를 이어 지속된 것이라는 사실도 유념해 둘 만하다.
또한 이 책은 우리의 고대연극사를 배우와 극장 공간이라는 독특한 시각에서 연구한 최초의 저서로서 기록될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한국의 고대연극에 배우의 전통이 존재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어릿광대라는 역할도 서양에만 있지 우리의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았다. 극장이라는 것도 서양연극의 개념에 따라 연극만을 전문적으로 공연하는 건축물이 아니면 극장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런데 우리의 궁궐, 생활, 자연, 축제 속에 뿌리를 두는 고대의 극장 공간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이것들이 고유의 연출원리와 미학을 지니고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여기에서 한국연극사를 서양연극사의 경우처럼 배우사와 극장사의 시각으로 기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렇게 얻어진 연구결과는 정신적으로 가난한 한국의 배우들을 민족적 긍지가 있는 예술가로서 존립하게 하고, 그들이 활동하는 극장을 서구식이 아닌 민족 고유의 미학이 구현된 공간으로 탈바꿈하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고 승 길 중앙대 교수·동양연극학회 회장·동양연극사
kaat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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