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악마’의 열광적인 응원을 놓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는데….
“국민 참가의 폭에서 볼 때 거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루 참가 인원 700만명은 작은 나라의 인구에 육박하는 숫자다. 70년대 한국의 산업화 기적이 국민을 빈곤에서 해방시켰고 스스로 쟁취한 민주화의 기적이 인간으로서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자각하게 했다면 국민에게 삶의 기쁨과 재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이 이번 월드컵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에선집단적 쇼비니즘이나 내셔널리즘의발로로 보기도 하는데….
“‘붉은 악마’를 선두로 한 국민적 응원을 내셔널리즘이라고 한마디로 처리하기엔 너무 건설적인 메시지가 많다. 나는 ‘붉은 악마’라기보다는 ‘국민 응원’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는 위험한 애국심의 발로가 아니다. 집단적인 도취도 아니다. 평생 여러 형식의 집단행동을 보아 왔지만 이 정도 규모의 집단행동에서 이만큼 절제된 흥분은 처음 봤다. 익명의 폭언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열린 조국애’라고 하겠다. 조국애는 인류애와 모순되지 않는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주의는 긍정적 언어다. 서양이 냉소 내지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다. 집단행동이 모두 자발적인 의사결정이었다는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
-그런 집단적, 국민적 열정은 지향하는 바가 있어야 할텐데….
“7000만 한국인의 화해라는 점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같다. 축구는 서민적이고 우리 국민의 기질에도 맞다. 북한도 8강 진출의 신화가 있지 않는가. 축구를 통해 남북한이 이같은 신화를 공유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축구를 매개로 한 7000만 한국인 축제를 정례화한다면 국민 통합이 민족 화해로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한일 공동개최는 잘 된 것인가.
“잘됐다고 본다. 한일간 교류는 황실교류, 조선통신사 등 지식인 교류, 식민시대의 교류, 국민·시민 교류의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한국·일본인들은 세번째 단계까지만 알고 네번째는 잘 모른다. 현재 하루 1만명이 양국을 오간다. 65년 국교정상화 때만 해도 1년에 1만명 수준이었다. 일본 20대의 한국에 대한 호감도는 70%를 넘는다. 이미 민간이 양국관계를 바꿔놓고 있다. 지금과 같은 교류폭을 심화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문제는 한일 공동개최의 성과를 잘 살려가는 일인 듯하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한일관계의 장애는 역사문제다. 역사 문제 해결을 위한 모델로 ‘브란트 모델’과 ‘무라야마 모델’이라는 두 모델을 제시하고 싶다. 우리 국민은 ‘브란트 모델’(빌리 브란트·1969∼1974년·전 서독총리), 즉 엎드려 통곡하면서 사죄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좌파까지도 천황이 히틀러, 무솔리니와 같이 취급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런 천황제가 존재하는 일본에서 ‘브란트 모델’은 바람직하나 현실적으로 어렵다. ‘무라야마 모델’을 이해해야 한다. ‘식민지 시대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과’를 언급한 1995년 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의 담화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일본의 사회당위원장 출신 총리로서 전후 50년을 반성하는 역사적인 발언을 했다. 사실 할 얘기는 다 한 것이었다. ‘브란트 모델’만큼 시원하지는 않았어도 일본에 바랄 수 있는 양질의 역사관이었다. 이같은 역사관을 구체화 문서화한 것이 98년 한일 파트너십이다. 문제는 일본 지도자들이 이를 실천해야 한다는 점이다.”
-월드컵의 한일 공동효과를 위해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많다.
“월드컵 공동개최의 시너지 효과가 판명된 이상 한일 FTA를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연구자 및 실무자 차원에서 검토한 결과 FTA를 도입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고 결론이 났다. 이제는 정부 학자 실무자 3자간 연구를 해야 할 때다. 다음 정권부터 본격적인 정부간 교섭이 시작되지 않을까 싶은데 빨라도 2년은 걸릴 것이다.”
-이번 서해교전에서 보듯 동북아의 평화는 한일관계만 좋아진다고 되는 것은 아님을 새삼 보여주었는데….
“나는 언제나 한반도 평화공존 및 통일 과정에서 일본의 경제적 역할이 필요하다고 역설해 왔다. 북한과 한국이 함께 일본의 경제적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일본이 정치적 리더십을 쥐는 길은 경제력을 정치력으로 전환할 때 가능하다. 축재(蓄財)는 기술이고 용재(用財)는 예술이라는 말이 있는데 일본에 바로 이 ‘예술’을 기대하고 싶다. 돈을 많이 쓰면서 전혀 인정을 못 받고 있다.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경제적 기여야말로 정치뿐만 아니라 역사 청산에 기여한다. 일본은 단기적으로만 보지 말고 한국과 협력하거나 독자적으로라도 한반도 평화공존 과정에 기여해야 한다. 경제적 상호의존성은 전쟁을 막는다고 하지 않는가.”
곽민영기자 havef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