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계에서 선거만 다가오면 등장하는 단골 메뉴들이 있다. 창당, 정계 개편, 개헌 등이 그것이다. 이제 국민도 정계 개편이나 개헌론이 불거져 나오면 선거가 멀지 않았구나 하고 짐작할 정도로 정치의식이 향상되었다. 이런 의제들은 더 이상 국민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식상한 메뉴만을 들고 나온다. 정치의식면에서 정치인이 국민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속보이는 정계개편의 수단▼
필요하면 개헌을 할 수도 있다. 어느 나라의 헌법이든 그 자체로 완성된 규범은 아니다. 우리 헌법 역시 미완성의 규범이며, 그런 점에서 개정에 대해 열려 있다. 특히 시대 변화에 따라 헌법 규범과 헌법 현실 사이의 괴리가 커지고, 그로 인해 국민의 불편이 가중되면 헌법 규범을 헌법 현실에 접근시키는 개정작업이 필요하다. 개헌은 반드시 이러한 국민적 필요성과 공감대 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근자의 개헌론은 일부 정치세력이 정략적 목적에서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 개헌을 거론하고 있는 정치인들은 주로 ‘이회창 대 노무현’이라는 양자 경쟁구도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현재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지만 한 가지 공통된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정계 개편, 즉 현재의 정치판을 뒤흔들어 놓고 싶어한다. 그래야 자신들의 활동공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정계 개편의 수단으로 이들이 찾아낸 것이 개헌이다. 개헌을 매개로 소외된 여러 세력이 결집해 현재의 양자 구도를 깨보자는 것이다.
이들은 개헌의 명분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들면서 대안으로 ‘분권형 대통령제’ 내지는 ‘이원집정부제’를 내세우고 있다. 현재의 대통령제가 많은 문제점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분권형 대통령제로 바꾼다고 해서 문제가 개선된다는 보장은 없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은 현행 헌법의 틀 내에서도 어느 정도 개선이 가능하다. 국무총리가 헌법에 보장된 권한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만 해주어도 이 문제는 상당히 해결된다. 총리에게 실질적인 각료제청권(87조 1항)을 주고 대통령에 대한 국정보좌권(86조 2항)을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현재와 같이 대통령이 비대한 청와대 조직을 근거로 국정에 일일이 간섭하는 대신 총리에게 상당 권한을 위임하고 대신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국정이 운영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개헌 없이 현재의 헌법 틀 안에서도 운영의 묘를 살리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도 일부 정치인들이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소외된 여러 세력을 하나로 묶는 데 가장 유리하기 때문이다. 대표 주자가 너무 많은 상황에서 그들을 엮기 위해서는 권력을 나누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개헌이 정략적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국민적 공감대가 전제될 때 추진되어야지 집권의 수단으로 제기되어서는 곤란하다. 더구나 분권형 대통령제는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주의를 온존 강화시킬 우려도 있다. 이 제도가 대통령과 총리를 특정 지역들이 나눠 갖는 식으로 운영된다면 3김의 퇴장으로 자연적으로 약화될 수 있는 지역주의가 다시 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국민적 공감대 먼저 형성을▼
이렇게 개헌이 추진 의도와 과정, 내용 모두에서 문제가 많은데도 일부 정치인은 1987년의 예를 들며 연내 개헌이 가능하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1987년에 개헌이 가능했던 것은 그 이전의 민주화투쟁을 통해 수많은 희생이 있었고, 전 국민이 직선제 개헌을 열망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비해 현재의 개헌론은 ‘당신들의 열망’에 불과하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팀은 각본 없는 드라마를 연출했고,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그에 감동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것은 이러한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해 우리 축구팀이 지난 500여일 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노력 없이 감동은 불가능하다. 현재의 헌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이라면 시간을 두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노력을 먼저 기울여야 한다. 그것만이 국민에게 ‘감동의 정치’로 다가올 것이다.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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