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프볼]대표팀 막둥이에게

언젠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톱 가드 전주원 선수와 오랜 시간 독대를 한 적이 있다.

그렇게 대화가 오가던 중 침착하기로 유명한 전주원도 꽤 흥분한 대목이 있었는데, 바로 기자가 던진 "엘리트 출신이라 막내들의 설움을 잘 모르겠다"에서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천재 가드로 칭송 받아온 전주원이지만, 본인 역시 선일 여중 1년생 때 소년체전에 참가하는 선배들의 대표 유니폼을 보고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 때부터 불현듯 농구 욕심이 샘솟았다고 항변(?)했다. 그제서야 기자 역시 선머슴 같이 짧은 커트 머리의 초년생 전주원이 경기가 끝난 후 방석이며, 물병을 잔뜩 챙기고 코트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떠올리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어느 조직이건 소위 "밥 그릇 수"로 일컫는 엄격한 선, 후배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남자들이라면 어색한 계급구조로 인해 힘겨웠던 군대 시절을 손쉽게 떠올릴 테다. 마냥 천사같은 항공사의 스튜어디스들의 세계가 그 어떤 조직보다 위계질서가 철저하다고 했던 말을 들은 기억도 새록 새록하다.

그렇지만, 아마도 조직력이 생명인 운동부의 선, 후배 체계만큼 명확한 것은 없을 것이리라는 생각이다.

오죽하면 태릉에서 만난 신세계 이언주 선수가 기자를 보고 처음 건넨 말이 "저 이제, 방쫄도 생겼어요. 방장되었다구요." 였을 정도로 선배의 위상은 드높기만 하다.

지난 6월 3일에 막을 내린 제 1회 4개국 초청 국제 여자농구대회 대표 명단에는 삼천포 여고 3학년 곽주영의 이름이 당당히 명시되어 있었다. 이는 박찬숙-성정아-정은순으로 이어지는 한국 여자농구의 4번 째 여고생 국가대표의 탄생이었다.

본인의 영광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대표 발표가 있었던 다음 날 열린 협회장기 여중부 결승전 삼천포 여중의 경기에서 삼천포의 한 관계자가 본부석 마이크를 쥐고 "저희 삼천포 여고 곽주영 선수가 국가대표에 선발되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를 격앙된 어조로 인사할 정도로 삼천포 전체의 자랑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자가 여자 국가대표팀을 태릉 선수촌으로 취재갔을 때 삼천포 전체를 뒤흔든 곽주영도 선배들의 볼을 챙기기에 급급한 막내였다.

언젠가 "최연소 국가대표"의 화려한 꼬리표가 따라다녔던 박찬숙은 당시의 태릉의 막내 생활을 "고통"으로 표현한 바 있다. 적게는 일곱 살부터 많게는 열살 넘게 차이 나는 선배들과 함께 훈련을 받으려니 주눅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강훈은 그렇다치고, 궂은 일이 여고생 박찬숙을 힘겹게 했다. "김장할 때나 사용하는 커다란 고무그릇에 가득 쌓인 딸기를 혼자 쪼그리고 앉아 일일이 꼭지를 떼고,씻은 적이 있었어요. 다리가 저리고, 손에서는 쥐가 났지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지요." 세탁기도 한 대조차 비치되지 않던 시절, 숭의여고의 명 센터 박찬숙은 선생님의 속옷 빨래까지 전담해야하는 힘겨운 막내 생활을 감내해야했다.

<박찬숙의 자서전 "툭 터놓고 사는 여자 중>

또 다른 여고생 국가대표 출신 정은순 역시 마찬가지 였다. 부상으로 88올림픽 대표에서 탈락한 정은순은 "당시에는 오히려 대표팀에서 나오는 것이 그저 좋을 뿐이었다.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한 기회인 올림픽을 못나가니까 언니들이 안됐다면서 위로를 했는데, 나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죠. 그런데, (성)정아 언니는 위로편지까지 쓰더라구요. 나는 선수촌을 나간다는게 너무 편하고 좋아서 짐도 천천히 가져가라는 걸 빠득빠득 우기면서, 다 가지고 나왔죠."

<정은순의 KWBCC와의 인터뷰 중>

세월이 지나, 태릉에 시설도 비약적인 발전을 했지만, 여고생 곽주영의 생활은 분명 막내 이상 아니 그 이하도 아닌 힘겨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대표팀 훈련이 한창이던 지난 5월, 곽주영은 소속 팀인 연맹 회장기에 참가중인 삼천포 여고 선수로 부랴부랴 게임에 참가했지만, 종전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숙명여고와의 준결승 전, 경기는 삼천포여고의 일방적인 우위로 이어졌지만, 삼천포 여고의 박정숙 코치는 경기 내내 곽주영의 플레이를 지적했다.

"너가 정말 대표 선수 맞니?"

하프 타임에 관중석 저편까지 울려퍼진 박코치의 꾸지람에 고개숙인 곽주영은 여린 19세 소녀의 모습이 그 자체였다.

이 날 경기에서 곽주영은 4쿼터 2분 경 5반칙 퇴장 당할 때까지 단 8득점에 그쳤다.

결국 떠들석했던 여고생 국가대표 곽주영의 국제 무대 데뷔는 12명에게 주어지는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해 코트에 발도 한 번 못 붙이고, 언니들의 시중 드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어쩌면 곽주영 역시 그동안의 여고생 국가대표가 그래왔던 것처럼 대표팀의 막내생활을 선배들의 배려에도 영광보다는 공포로 느끼고 있을 지도 모른다.

곽주영은 그야말로 2000년대 한국 여자농구가 낳은 확실한 재목이다.

10년 넘게 대표팀 불박이 센터로 활약했던 성신여대의 조문주 코치는 "오히려 내 현역 때보다 주영이가 좋은 플레이를 펼친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당장 프로에 가도 절대 밀리지 않을 것" 이라며 곽주영을 치켜세웠다.

"언젠가 주영이와 유명한 패스트 후드 점에 갔을 때였어요. 치킨 점마다 판매하는 비스킷과 함께 나오는 딸기쨈을 삼천포에서는 본적이 없다나요? 딸기쨈의 똑딱 오픈 법을 처음 본다며 너무 신기해하는 천진난만한 모습이었죠. 결국 집에 가져가겠다고 해서 딸기 쨈을 몇 개 싸 가지고 나온 적이 있지요."

곽주영과 청소년 대표를 함께 역임했던 한 선수는 곽주영의 인상을 "패스트 후드 점의 풋풋함"으로 각인하고 있었다.

곽주영의 나이 이제 고작 19세다. 첫 국제대회에서의 시련을 기억하기에는 아직 할 일이 너무나 많다.

지금은 기자의 질문에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풋내기 곽주영이지만, 언젠가 반드시 한국 여자농구의 중심에서 곽주영은 코트를 호령할 것이다.

일단, 곽주영이 프로무대를 우뚝 설 겨울리그를 기다려보자.

거스 히딩크의 표현대로 곽주영의 진가를 "그 때 알게 될 것이다."

[노성수의 그때 그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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