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지 못한 이명박市長▼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과 친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자신과 입장을 같이 하는 사람, 자신과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 자신과 스타일이 비슷한 사람과는 자연 가깝게 지내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관계가 껄끄럽게 된다. 물론 친구라고 해서 무조건 자신을 좋다고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쓴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정말 친구인 것이다. 친구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쓸쓸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사실은 개인에게서만이 아니라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친구 만드는 법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월드컵을 통해 전 세계에 많은 친구 국가들을 만드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애국심도 갖게 되었다. 남을 무조건 경계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수용하는 것이 바로 민족주의와 애국심과 직결된다는 진실을 깨우쳐 준 것도 바로 월드컵이었다.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프랙티스를 운동시합에서나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때 비로소 외국인들과 친구가 될 수 있고 우리를 남에게 드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일본이 자신들은 8강에 못 나갔지만 아시아를 대표해 한국이 선전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열심히 응원한 장면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물론 일본은 과거 자신들이 아시아를 대표한다고 생각할 때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자신들을 지지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했던 나라다. 그러나 한국이 월드컵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시아 국가가 되면서부터는 우리를 열렬하게 응원해주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해 우리가 만약 반대의 상황에 처해 있었더라면 일본을 그토록 열심히 응원했을까. 이제 우리도 작은 나라가 아니라 아시아를 대표하는 큰 나라로서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할 줄 알 만큼 성숙해야 한다. 늘 핍박받고 살아온 과거에만 얽매여서는 안 된다.
반면 중국은 우리를 열심히 응원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시샘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이탈리아의 심판판정 불복을 편들고 나섰을 때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참으로 옹졸하고 아시아의 강대국답지 않은 태도를 보인 중국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과 그렇게도 비교가 되도록 행동한 중국에 대해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터키와 중국 경기에서 우리가 터키를 응원한 사실을 기억하는가. 아마도 그 때 중국 사람들은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제껏 가까운 이웃이라고 은근히 생각해온 한국인들이 저 멀리 있는 터키사람들을 응원하는 모습에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생길만도 하지 않았겠는가.
이명박씨가 서울 시장에 당선되고 난 직후부터 그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고 있다. “히딩크와 아들을 공적인 장소에서 사진찍도록 했다” “태풍이 났는 데도 부인 동창회에 연설을 하러 갔다”는 등등 공인으로서의 자세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들이다. 그의 행동을 비난하는 글들이 홈페이지를 장식하자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또 글들을 올렸다. 비난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인 비판자들인 반면 옹호자들은 동원된 아르바이트생들이라는 의혹이 있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당당하지 못하다면 변명하는 것보다는 깨끗이 인정하는 편이 더 낫다. 그것이 시민들을 친구로 삼는 방법이다.
▼변명보다 깨끗하게 인정을▼
무대가 국제사회든, 국내사회든 서로 친구가 되는 법은 그 원칙에 있어서 같다. 첫째,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면 과정상의 오해는 풀리게 되어 있다. 둘째, 진실에 기초하지 않은 친구관계는 오래 갈 수 없다. 불리한 진실이 유리한 허위보다 백번 낫다. 셋째, 비판을 하기 전에 먼저 상대를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남이 해주는 비판은 곰곰이 새겨들어 자신에 대한 충고로 만들어야 한다. 넷째, 상대의 의도를 선의로 일단 해석해야 한다. 만약 상대가 악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 다섯째, 잘못의 원인이 외부에 있다고 판단되더라도 남을 비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마음 속으로 판단하는 것과 바깥으로 드러내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김형철 연세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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