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진짜 성능 좋은 초대형 진공청소기는 다른 곳에 있었다. 김남일 선수가 인터넷에서 수십만명의 팬들을 탄생시키고 있을 때 이 정권의 책임자인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는 흡사 먼지와 반지도 구별하지 않고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처럼 기업으로부터 47억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대가성 없이’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이 아들뿐인가. 3남 홍걸씨는 이미 각종 이권에 개입해 37억원을 챙긴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고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 실세 여럿이 뇌물 때문에 봉변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 정권은 그야말로 뇌물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진공청소기 그 자체였다. 실제로 받은 돈이 검찰 수사에서 몽땅 드러났을 리 없기 때문에 이 진공청소기의 성능은 국민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했을 게 틀림없다.
▼왕조시대 권력구조인가▼
지금이 무슨 왕조시대도 아닌데, 그래서 그들의 신분이 왕세자나 황태자도 아닌데 기업들이 대통령 아들들에게 돈을 바쳐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외형적으로 정치형태나 정부조직은 왕권시대와 완벽하게 달라졌지만 실제로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은 수세기 전의 왕조시대보다 오히려 더 도덕적으로 타락한 느낌이다. 대통령 측근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이 집중되고 그 속으로 뇌물이 흡입되는 나라라면 민주주의 국가라기보다는 왕조시대의 권력구조를 더 닮은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이 정권은 우리 정치를 그렇게 후퇴시켰다.
기업이 권력자에게 준 돈에 대가성이 없다고 발표한 검찰의 수사결과는 시중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기업이 얼마나 영악한 존재인데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않고 대통령 아들들에게 ‘용돈’으로 그런 규모의 돈을 주었다니 천지에 그걸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 걸로 생각하는지 검찰에 묻고 싶다. ‘세상에 공짜 점심이 없다’는 말처럼 언젠가 권세 있는 사람이 점심값을 몇 배로 갚아줄 걸 기대하지 않은 채 그처럼 쉽게 돈을 내놓을 만큼 기업이 허술하고 너그러운 존재인가. 경제학적으로도 기업의 존립 목적은 이윤추구에 있는데.
뇌물이 오고갈 당시 소떼를 몰고 북한을 찾던 현대그룹은 금강산관광을 비롯해 대북사업의 환상에 깊이 빠져 있었다. 남북 정상회담만 성사되면 노벨평화상은 떼어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을 정권에 현대그룹은 고마운 ‘동반자’였음에 틀림없다. 대통령이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현대그룹을 격려하고 있을 때 홍업씨는 결과적으로 대북사업권을 놓고 현대그룹과 ‘장사’를 하는 놀라운 상술을 보여준 셈이다. 그 후 지금까지 대북사업에서 현대가 어떤 자리에 위치해 왔는지는 국민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또 하나 우리는 홍업씨가 집중적으로 돈을 ‘빨아들인’ 시점에 주목해야 한다. 1998년 상반기는 외환위기의 충격으로 국내 기업들이 온통 혼란 속에 빠져 있을 때였다. 금리와 환율이 폭등하는 바람에 자금줄이 끊긴 기업들은 언제 부도가 날지 몰라 하루하루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웬만한 탐욕으로는 기업에 손 벌릴 염치를 내지 못할 시기였지만 대통령의 아들은 기업의 어려운 사정에 개의치 않았다. 정권이 바뀌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진공청소기를 맹렬하게 가동시켜 허기를 채우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이즈음 김 대통령이 경제분야에서 가장 강조한 단어는 ‘기업의 투명성’이었다. 환란이 기업과 은행의 불투명한 경영에서 비롯됐다는 진단 때문에 대통령은 틈이 날 때마다 경영의 투명성을 주창했다. 그러나 한쪽에서 그의 아들은 필연적으로 기업회계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뇌물받기에 몰두했다. 수십억원을 비공식적으로 지출한 해당 기업들이 그 돈의 용처를 투명하게 회계처리할 수 없다는 것쯤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국민은 희망마저 빼앗겨▼
그처럼 불투명한 경영을 하면서 기업이 번창할 수 있던 시대는 환란 이후 사라졌다. 결국 가장 많은 뇌물을 바친 기업은 독점으로 주도했던 금강산사업이 실패해 지금 이 시간에도 엄청난 국민의 세금을 잡아먹고 있다.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논리를 펴자면 권력에 준 뇌물을 지금 국민이 몇 배로 갚아주고 있는 셈이다.
권력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은 지칠 만큼 반복되어 온, 실현성 없고 진부한 얘기일 뿐이다. 그들의 탐욕을 단절하는 길은 뇌물을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의 동력을 끊는 일이지만 친인척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그 또한 부질없는 소리다. 그래서 이 정권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희망마저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인 느낌이다.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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