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교동 초등학교 6학년 권미로양(온라인 닉네임)은 네이버닷컴(naver.com) 주니어 클럽의 가상 방송사 크룬(CROON) 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이다.
권양은 12일 오후 3시반부터 생중계된 새 뮤직쇼 ‘퍼니 뮤직’의 공동 MC를 초등학생 강민(온라인 닉네임)과 함께 맡았다. 가수들은 서울과 지방 곳곳의 초등학생들. 중계 내용은 이렇다.
<권미로> 퍼니뮤직이 첫발을 내딛는 만큼 조바심과 설렘도 큽니다.(중략) 신인 가수로 활약 중인 한제로씨의 ‘무비스타 루씨!’를 들어볼께요.
‘∼난 될거야∼되고 말거야∼/아직 나를 몰라보고 있는 것 뿐야∼/지금 내 모습 초라하지만∼날 두고봐∼/난 언제나 꿈을 꾸었어∼화면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어/∼이제는 나를 멈출 수 없어∼후회 없는 내 인생을 살아볼거야∼/∼wanna be a movie star∼wanna be a lucky 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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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무비 스타가 되고 싶다는 한제로의 영어 가사는 숱한 초등학생들의 작은 가슴에서 울렁대는 열망의 구호다. 이날 뮤직쇼의 가수들은 실제 카메라 앞에서 백댄서들과 춤추며 열창한 것이 아니다. 직접 작사한 가사를 크룬 엔터테인먼트의 채팅방에 문자로 띄워올린 것이다.어른들에겐 이같은 가상 가요 스테이지가 우스울 수도 있다. 그러나 ‘퍼니 뮤직’은 정교하게 진행된다. ‘생방송’ 도중에 지방 ‘시청자’들을 전화로 연결해 소감을 중계하기도 하고, ‘귓속말’이란 1 대1 창을 통해 “권미로님, 저는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요. 오늘 MC는 여기까지만 맡을게요”(강민) 속삭이고는 사라지기도 한다.
만 10∼12세 소년 소녀들을 일컫는 프리틴(preteen)은 우리 사회에서도 어른들이 모르는 사이에 쑥 커 버렸다.
권미로라는 닉네임은 가수 권보아의 성과 ‘조이박스’의 보컬리스트 미로의 이름을 따온 것. 권양은 4월초 크론 엔터테인먼트와 음악 감상실 ‘From Soul’을 주니어네이버에 열었다.권양은 온라인 대중문화에 몰입해 지내지만 지극히 활달하고 정상적인 초등학생이다. 몇 년간 학급 회장, 부회장을 번갈아 맡았으며 반석차 1,2위를 다투는 우등생이다. 초등학생 성가대 단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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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어 네이버 등 어린이 인터넷 사이트에는 갖가지 가사들과 창작 소설들, 가상 음반 자켓 등이 넘쳐난다. 대개의 내용은 ‘착한 초등학생’의 한계를 넘지 않지만 연애 감정 등에 이르면 어른들이 생각하는 이상의 대담하고 성숙한 표현도 나온다.
‘내 마음 속엔 오직 그대의 자리 뿐∼어서 와요 당신∼내 품 속으로∼그대 향기가 내 몸을 감싸도록∼내 품 속으로 달려와요∼’(닉네임 ‘희연’의 1집 ‘희연’)
‘언제나 내 꿈엔 비가 내려 차가운 바람도 불고 있어∼널 기다리는 내 삶의 끝 본 것만 같아 어떡해∼절대 너인 걸 어떡해∼’(닉네임 ‘하빈’의 1집 ‘淚’)
초등학생 대중문화 클럽들의 컨텐츠 역시 ‘어른스럽다’. 주니어 네이버 클럽 곳곳에는 인기 가수 세아 인터뷰, 신인 가수 루나 탐방, 가상 스포츠신문의 연예인 커플에 대한 기사, ‘시트콤 잘났어 정말’의 탤런트 공모 등이 떠 있다. 참여학생들은 작가 감독 카메라맨 탤런트 등을 정해 역시 채팅창에서 ‘촬영’을 하기도 한다.
이들은 저작권 개념에 익숙하며 ‘표절’ ‘도용’이라는 말을 어렵잖게 사용한다. 크론 엔터테인먼트와 절친한 클럽인 이미지·로고 클럽 ‘Ro Go Net’을 운영하는 권지유양(닉네임·경기도 남양주 별내초등 5)은 한 모방 클럽이 권양 클럽의 가수 보아 이미지를 무단으로 사용하자 여러 차례의 항의문 연대 게시 등을 통해 이를 철회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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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양처럼 온라인 대중문화 클럽에서 활동하는 초등학생들은 의외로 많다. 만 13세 미만만 가입할 수 있는 주니어 네이버의 경우 2만8000여개의 클럽이 있으며 320여개의 가상 방송사 등 2000여개의 대중문화 클럽이 있다. 야후 꾸러기 클럽의 경우 2만3000여개의 클럽이 있으며 이중 7000여개가 대중문화 관련이다.
이들 클럽 가입자 대다수가 초등학교 5, 6학년생이다. 주니어 네이버 클럽마스터인 정미희씨(24)는 “초등학교 6학년생들은 인형을 가지고 놀기에도, 성인 세계로 들어가기도 애매한 나이”라며 “실제 세계에서 위험한 금기를 넘기보다 가상 세계에서 어른들의 세계를 만들어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틴에이저라 할 수 있는 만 13세 이상도 아니고 아동이라 불릴 수 있는 만 6∼9세도 아닌 중간 세대. 미국 등에서 일찌감치 프리틴(preteen)이라 불려온 만 10∼12세 그룹의 세대적 분화가 한국에서도 뚜렷이 진행되는 조짐이다.
한국 사회에서 프리틴세대 분화에 박차를 가하는 양대 축은 대중문화와 인터넷의 세례다. 대중문화의 컨텐츠는 학교도 부모도 이들을 아이 취급하며 가르쳐 주지 않는 ‘사랑, 인생’ 등을 가상체험하게 한다.
인터넷은 이들이 정보를 주고받는 비공식적인 교육기구이자 ‘머리’가 너무 커버린 프리틴들이 적당히 몸을 숨기며 놀 수 있는 공간이다.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 6학년 오모군은 채팅공간에 들어갈 때면 언제나 나이를 몇 살 얹어 소개한다. 나이를 속이고 형 누나와 애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덧 자신이 성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황상민 교수(연세대)는 이에 관해 “중고등학생들은 자의식을 갖고 자신의 생각을 현실세계에서 표출하려 하는데 비해 ‘프리틴’의 경우 의식은 초등학생 수준을 넘어섰지만 여전히 초등학생이라는 현실의 딱지를 인정한다. 그 괴리감을 온라인 공간에서 해소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전교조 초등정책 담당 방대곤 교사는 “아동문화에도 청소년 문화에도 낄 수 없는 이들은 어찌보면 낀 세대”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씨는 이제 막 분화하는 한국의 ‘낀 세대’ 프리틴의 사회문화적 가능성을 낙관한다.
“프리틴 세대가 얼핏 기성 스타들을 숭배, 모방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TV 신문 등 올드 미디어들이 관행에 따라 스타를 만들어내고 있다면 지금의 프리틴은 인터넷이라는 뉴 미디어를 통해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는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최초의 세대일 것이다.”
권기태기자kkt@donga.com
박현진기자 witness@donga.com
주니어 네이버의 초등학생 대중문화 클럽 | |||
클럽 성격 | 클럽수(개) | 회원(명) | 회원 최다 클럽(명) |
팬 클럽 | 192 | 9200 | ‘조성모 팬 클럽’(2850) |
음반, 뮤직 비디오 | 33 | 523 | ‘음악-리틀뮤직’(105) |
방송사, 기획사 | 325 | 18504 | ‘SN 방송국+기획사’(1521) |
대중소설 | 249 | 8762 | ‘소설방’(2665) |
영화 | 189 | 22785 | ‘해리포터 학교’(12929) |
로고, 이미지 | 392 | 35957 | ‘Ro Go Net’(2310) |
애니메이션 | 176 | 4544 | ‘만화주인공 키우기’(3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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