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과 사람<30>]잿빛구름을 갓삼아 쓴 제우스신화 ´그리스 올림포스산´

  • 입력 2002년 7월 19일 15시 42분


여름철에 접어든 6월의 올림포스산의 모습. 올림포스 정상 주변엔 녹지 않은 눈이 눈에 띈다. 불가리아 등반객 5명이 2200m 지점의 평지에서 지친 다리를 두드리며 쉬고 있다.[사진=박영대기자]
여름철에 접어든 6월의 올림포스산의 모습. 올림포스 정상 주변엔 녹지 않은 눈이 눈에 띈다. 불가리아 등반객 5명이 2200m 지점의 평지에서 지친 다리를 두드리며 쉬고 있다.[사진=박영대기자]

《“신(神)의 보금자리가 영원한 곳, 올림포스여/비바람에 꿈적도 않고/한줄기 맑은 공기가 산을 감싸오니/구름을 헤집고 나온 햇살이 산자락을 비춘다.”

호머는 기원전 8세기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올림포스를 이렇게 노래했다.

올림포스만큼 오래 전부터 주목받아온 산이 있을까. 하지만 세월은 군신(群神)들의 터전이던 올림포스를 망각의 늪에 밀어 넣었다. 로마시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유일신이 강조되는 기독교가 지배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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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반도 남쪽 아테네에서 해안선을 따라 차를 타고 북쪽으로 5시간 가량 달려가면 그리스 최고봉(2918m)인 올림포스산이 나타난다. '으뜸 신'인 제우스가 부인 헤라(가족 질투의 여신), 자녀들인 아폴론(음악 예언 태양의 신), 아프로디테(아름다움의 여신), 헤르메스(전령의 신) 등 12신과 함께 지냈다는 신산(神山)이다.

올림포스산에서 내려다 본 산밑 마을 리토호로. 마을 너머로 그리스반도 동쪽의 에개해가 눈에 들어온다. 빨간 지붕을 덮어쓴 전통가옥 200여채가 옹기종기모여 있는 이 마을은 올림포스 관광의 출발점으로 이용된다.[사진=박영대기자]

지난달 이 곳을 찾았을 때 초여름인데도 베이스 캠프격인 산밑 마을 리토호로의 호텔은 텅 비어 있었다. 리토호로는 비잔틴 문화의 영향으로 붉은 기와를 덮어쓴 전통가옥들이 200여채 모여있는 해발 1000m 산중턱의 마을. 500명이 채 안되는 인구에다 노인들의 느린 걸음이 유난히 눈에 띄는 '한물간' 관광타운이다. 밀농사를 제외하면 호텔 식당 기념품가게에 마을 전체가 매달려있다. 기념품 가게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은 "오래 전부터 꿈을 잃은 젊은이들이 큰 도시로 떠나버렸다"고 말했다.

해거름 무렵 처음 마주한 올림포스는 시커먼 먹구름을 갓처럼 쓰고 서 있었다.

올림포스는 변화무쌍한 기후로 정평이 나 있다. 동튼 후 두세 시간만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을 뿐, 산 정상은 하루종일 짜증스런 잿빛구름에 덮여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좀처럼 정상을 보여주지 않는 험산(險山)을 올려다보며 "저런 곳이라면 신들이 살겠다"고 공감했다던가. 그러나 이는 에게해(海)에서 불어온 습한 공기가 산을 타고 올라가다가 기온이 떨어지니까 수증기가 엉겨붙어 산 정상이 구름에 뒤덮이는 현상이다.

이튿날 아침부터 몇 시간을 올랐건만 신화를 연상할 수 있는 소재는 아무데도 없었다. 그리스 제2도시인 데살로니카에서 왔다는 그리스인 살리나스는 "그리스인들은 이 산에서 신화의 흔적을 기대하기보다는 '올림포스'란 이름 자체가 주는 전설적인 힘 때문에 찾는다"고 말했다.

소나무 전나무 너도밤나무가 우거진 숲을 지나 오전 10시가 지나자 해발 2100m에 마련된 첫 산장에 관광객들이 모여들었다. 올림포스가 오히려 그리스 밖에서 더 인기라는 점은 투숙객 수에서도 드러난다. 산장관리인은 "2001년 약 8300명이 묶고 지나갔지만 그리스인은 3200명 가량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인도 2명 다녀갔다.

스위스 독일 불가리아에서 온 등산객 10여명이 있었지만, 바람둥이 신 제우스의 애정행각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이들은 찾아볼 수 없다.

마리아 졸로타스는 리토호로에 살면서 산장일을 10년 가까이 도와왔다. 수채화로 제우스를 그려넣은 올림포스 지도를 팔던 그녀는 신화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대는 기자에게 "(신화를 느끼고 싶으면) 눈을 감아 보라"고 귀띔했다.

구름에 파뭍힌 돌밭에 서서 그녀의 말대로 눈을 감자 찬 공기가 가슴을 후비면서 어느 덧 제우스가 번개를 움켜쥐고 천하를 호령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올림포스산은 현실보다 상상속에서 그 신화의 실체가 생생히 되살아나는 것일까.

2200m에 걸쳐있는 식생(植生)한계선을 넘어서면 잡풀들만 드문드문 자란다. 만년설 조각을 몇 차례 밟고 지나 정상에 오르면 올림포스의 유일한 신화흔적이 있다.

정상에 있는 수십 미터짜리 넓적한 바위절벽과 움푹 패인 축구장 만한 분지가 그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바위절벽을 제우스 옥좌의 등받이라고 생각하고 분지를 제우스의 발자국으로 믿는다고 했다.

80년대 그리스 정부가 올림포스산에 스키장을 개발한다는 계획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리스는 물론 유럽인들이 이 산의 정상에서 반대시위를 벌여 계획을 백지화시켰다. 어쩌면 이때가 유럽인들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올림포스를 위해 처음으로 한목소리를 낸 경우일지 모른다.

올림포스 사랑은 그래도 리토호로 주민의 몫이다. 교사인 조지 올림피오스는 올림포스가 좋아서 자신의 성(姓)까지 바꿔버렸다. 그는 날씨가 가장 좋다는 10월이 오면 마을사람들과 올림포스 12신의 모형을 뒤집어 쓴 가장행렬을 개최한다. 물론 유럽에서 온 관광객 수십 명만이 지켜볼 뿐이지만. 그는 "이 마을 주민들은 구름낀 올림포스산을 올려다보며 자연 속에 묶여 사는데 만족하고 있다"며 말했다.

리토호로(그리스)=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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