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얼핏 뒤죽박죽인 것 같은 책들에는 나름대로의 숨겨진 질서가 있다. 책 찾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이 그 증거다. 도서관 같은 데서 책 찾아 달라면 대개 숙달된 직원이 3분이고, 눈썰미 좋은 베테랑 사서라야 1분 정도다. 하지만 나는 3초 이내면, 수천 권을 헤아리는 내 장서의 틈바구니에서 내가 찾는 책을 정확하게 뽑아들 수 있다. 이를테면 비장의 분류법 같은 것으로 정리해두었기 때문이다.
고백컨대 이 비법이라는 게 사실은 공간의 협소함 때문에 생겨난 고육지책에 지나지 않는다. 대학생 시절부터 나는 무슨 분류의 원칙 같은 것을 적용할 만큼 여유로운 책장을 가져보지 못했다. 책을 사면 어찌어찌 빈 틈을 찾아내서 꽂아 두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번 꽂아두면 그것은 그 책의 영원한 주소가 되었다. 그렇다. 내 책들에는 주소가 있다. 이 주소는 다섯 번 이사하든 열 번 이사하든 바뀌지 않는다. 심지어 책장이 바뀌어도 책 주소는 그대로다. 이렇게 내가 사서 읽은 책들은 내 의식 안에서 책장의 어디쯤이라는 공간과 결부되면서 그 영원한 도메인을 지정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도메인은 내 의식 속에 저장되고, 내 삶의 역사 속에 봉인된다.
나는 책을 아주 무식한 방법으로 구입한다. 대개 서점에서 제목, 저자, 내용 등에 현혹돼 충동적으로 지갑을 털어 사곤 하는 것이다. 어쨌든 책과 첫 인연을 맺을 때 내 발로 서점 문턱을 넘어서는 노고를 치루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강의가 끝나는 금요일 오후는 학교 앞 서점을 순례하는 시간이다. 한두 시간 투자해서 한 아름의 책을 사고 연구실로 돌아와서는 침대를 겸한 소파에 드러 누워 밤 늦게까지 읽다가 간다.
이런 생활을 이십 년 가까이 하다보니 쌓아둘 곳 없는 책들로 넘쳐 나면서 가위 공간과의 전쟁이라고나 불러야 할 상황에 맞딱뜨리게 된 것이다. 한동안 꽤 체계적으로 부여되던 책 주소가 다시 엉망진창으로 헝크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좌우간 비집고 들어설 틈만 있으면 선착순으로 새로 산 책들의 주소가 되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옛 악습이 도져, 하이데거 전집 틈에 ‘카트린 M의 성생활’이 끼이기도 하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옆에 아멜리 노통의 ‘적의 화장법’이 꽂히는 난맥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고난 뒤에 나는 가끔 ‘내 서재에 불이 난다면?’ 하고 가정을 해보는 버릇이 생겨나게 되었다. 물론 나는 살고 봐야 하니 무조건 튈 작정이다. 그러나 제발 불이 나더라도 몇 권의 책만은 챙길 여유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그 경우에 대비해서 여덟 권을 의자에서 손닿는 곳으로 그 주소를 변경해 두었다. 그것들은 대개 출판사가 망해서 이제 더 이상 서점에서는 구입할 수 없는 책들, 가령 한기수의 ‘한 정신과 의사의 실존적 자기분석서’, 라이얼 왓슨의 ‘생명조류’, 제임스 미치너의 ‘작가는 왜 쓰는가’, 빅터 프랭클의 ‘인간이란 무엇인가’ 등이다. 어쨌든 사업이 망하고 제도가 망해도 인류의 유산인 이 책들은 망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사람도 책과 닮았다. 주변 사람들의 에피소드는 언제나 특정한 장소와 결부되어 내 의식 속에 남아 있다. 내가 지인들에게 한번씩 그런 추억들을 그 공간의 디테일까지 상기시키며 이야기해 주면 그런 기억력에 깜짝깜짝 놀라워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세월의 더께처럼 그 실존의 도메인이 의식 안에 지울 수 없는 무늬로 남아 있는 탓이다. 나는 그저 의식 속의 그 무늬를 더듬어 내고 있을 뿐이다. 그 표정, 언어, 추억들은 이토록 생생하게 남아있는데, 더 이상 그 현존은 지상에 없는 이들도 더러 있다. 슬프게도 내게는 그들을 운명의 손길로부터 보호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고작 색 바랜 헌책 몇 권을 화재의 불길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 뿐이다. 생각하면 한심한 노릇이다. 그러나 바라건대 부디 내 생전에 서재에 불 나는 일만은 없기를.
이왕주 부산대 교수·철학·wajlee@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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