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천황(재위 1868∼1912)은 일본이 보잘 것 없는 동양의 한 군주국에서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 제국으로 발돋움할 때 그 원동력이 된 존재였다. 따라서 ‘메이지’는 단순한 연호가 아니라 일본의 잠재된 에너지가 한꺼번에 폭발하던 유신시대를 상징하는 역사용어라고 할 수 있다.
메이지유신은 조국의 근대화를 열망하던 한국 정치인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오죽하면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나 5.16쿠데타의 주역 박정희가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아 근대화 프로젝트를 추진하였겠는가. 메이지 천황을 제외하고 우리의 근현대사를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실제로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한일간에는 정한론, 강화도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갑오경장, 명성황후 시해, 을사조약, 군대 해산, 국권 침탈 등의 사건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도 한반도를 무대로 하여 전개되었다. 일본은 이 과정을 통해 제국주의 열강의 반열에 오른 반면에 한국은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한국인은 대체로 메이지천황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이거나 일면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한국인에게 메이지천황은 ‘군인칙유’나 ‘교육칙어’ 등을 반포하여 일본인을 한국침략으로 내 몬 ‘군국주의의 화신’이라는 인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더구나 조선총독부가 메이지천황이 죽은 후 그의 신령을 서울 남산 조선신궁에 모셔놓고 참배를 강요하였으니 이러한 이미지를 갖게 된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미국의 저명한 일본문학 전공자 도널드 킨이 쓰고 장년의 언론인 김유동이 번역한 ‘메이지천황’(상,하)은 한국인과는 전혀 다른 메이지 천황관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와 달리, 역사적 원한에서 자유로운 도널드 킨은 메이지 천황이 국내외 정책이나 전략의 실제 입안자가 아니라 인자한 통솔자였다는 점을 내세워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히려 메이지 천황은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그의 치세와 그 후세 사람들을 비범하고 용기 있게 만든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 수많은 변혁을 이끈 공신들에게 항상 마음의 의지처가 되었던 ‘더 그레이트(The Great)’ 즉 ‘대제(大帝)’였다고 추켜 세운다.
도널드 킨은 1200여쪽에 달하는 이 책에서 근대 일본의 천황제가 어떻게 확립되고 또 어떠한 기능을 하였는가를 메이지천황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을 통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일본 문학자답게 ‘메이지 천황기’라는 기본 사료 이외에 메이지천황이 남긴 시가(詩歌)와 일화 등을 종횡으로 구사하면서 그의 인간 됨됨이를 다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메이지천황은 열네 살에 즉위했을 때만 해도 유신의 지도자들이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로보트(손바닥 안의 옥)’로 보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학습과 수련을 통해 만세일계 천황의 후예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갖춰갔다. 그는 또 자신에게 매우 엄격한 인간이어서, 좋고 싫음을 좀처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더위, 추위, 피로, 배고픔 등 보통 사람을 괴롭히는 일들에 대해 그는 불평한 적이 없었다. 교통편이나 숙박시설이 형편없던 시절에도 그는 한증막 같은 가마를 타고 전국을 순행하면서 국민들에게 근대 일본의 국가의식을 심어주었다. 그리하여 러일전쟁을 도발할 즈음, “백성을 위해 마음이 편할 때가 없네 / 몸은 구중궁궐 안에 들어 있건만”이라는 시가를 읊을 정도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지도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도널드 킨의 시각에 선다면 메이지 천황과 거의 같은 시기, 같은 기간 동안 조선을 통치하였던 고종은 어떠한 이미지로 묘사될 것인가? 이 책을 덮으면서 떠오르는 착잡하고 괴로운 상념이었다.
정 재 정 서울시립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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