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 따로 당 따로’▼
일부 정치인들은 국민정당이란 말을 입에 올리기 좋아하는 것 같지만 이는 아무래도 좀 우스운 얘기다. 국민이 바탕인 정당이라며 그렇게들 말하는 모양인데 아니, 민주국가에 국민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정당이 어디 있나. 이념이나 생각보다는 지역이 중심이 되다보니 한 당에 극우성향에서 좌편향까지 뒤죽박죽인데 그렇다고 스스로 지역당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두루뭉수리로 국민정당이라고 둘러대는 게 아닌가.
아무튼 민주당의 내분은 갈수록 지리멸렬로 치닫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당의 구심이 분명찮아 보인다. 표면상으로야 한화갑(韓和甲) 대표와 11명의 최고위원으로 이루어진 최고위원회가 당의 중심이다. 그러나 이런 집단지도체제는 좀처럼 효율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대표의 말이 최고위원들에게 잘 먹히지도 않는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는 당정분리 원칙에 따라 당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후보 따로 당 따로’이기가 일쑤다.
7월4일 노 후보는 기자회견을 갖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중립내각 구성을 요구했다. 국무총리와 법무부장관, 행정자치부장관 등 선거관련 부처 책임자를 한나라당 추천도 받아 새로 임명해달라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당쪽에서는 노 후보의 기자회견 직전에서야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몇몇 최고위원들은 그렇게 중요한 사안에 대해 당과 사전논의조차 없느냐며 불만을 쏟아냈다. 비주류 측은 아예 ‘관심 없다’며 소가 닭 보듯 한다. 민주당의 한 중진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당정분리는 사실상 형식논리다. 정치논리에는 맞지 않다. 최소한 대선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후보가 당의 중심이 돼야 하는데 당정분리와 집단지도체제란 형식에 끌려가다 보니까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엉망이 돼버렸다.”
엉망이 돼버린 첫째 원인은 물론 ‘노풍(盧風)’이 가라앉으면서 노 후보의 지지도가 곤두박질친 데 있다. 거기에 후보의 문제와 당의 문제가 겹치면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더구나 노 후보는 8·8 재·보선 이후 대선후보를 재경선할 수 있다고 했다. 노 후보로서야 말이 그렇지 실제 재경선까지 갈 수야 있겠느냐고 배수진을 쳤다지만 전장(戰場)에 나선 장수가 자꾸 다른 장수가 와도 좋다고 하는 격이니 힘이 실릴 턱이 없다. 비주류 측은 이를 빌미 삼아 8·8 재·보선 후에 보자고 벼르고 있는 형국이다. 이래저래 지금의 민주당이 노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는지 의문이다. 공공연하게 후보교체론이 나오고 있으니 국민으로서도 미심쩍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의문은 청와대로 이어지면서 더욱 깊어진다. 김 대통령은 노 후보의 중립내각 요구를 사실상 무시했다. 아태재단 해체, 김홍일(金弘一) 의원 사퇴 등 노 후보 측 주문에도 고개를 돌렸다. 김 대통령이 이미 탈당했으니 현 내각은 중립내각이고 따라서 원내 2당인 민주당 후보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제 ´묘수´는 없다▼
그러나 이 또한 형식논리일 뿐이다. 정치논리로 보면 김 대통령과 민주당은 여전히 한몸이다. 국민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6·13 지방선거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같은 논리에서 김 대통령이 노 후보로 정권재창출을 하려고 생각한다면 웬만한 그의 요구는 들어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심지어 ‘밟고 지나가는 것’도 용인해야 한다. 그런데 그럴 것 같지 않다. 김 대통령이 정권재창출에 초연한 채 오로지 정권마무리에 진력하려는 것일까.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만 권력의 논리로는 이 역시 맞지 않는 얘기다.
어차피 이런저런 의문의 답을 찾으려면 8월 8일 이후를 지켜봐야 할 듯싶다. 재보선 결과가 결정적 변수겠지만 결과가 어떻든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 무슨 ‘묘수’가 따로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새 후보를 찾든, 정계개편을 하든 남은 5개월은 너무 짧지 않겠는가. 정도(正道)를 가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5개월도 짧은 시간만은 아니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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