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제약사들의 직접적인 국내 진출 기간이 불과 10년 안팎인 점을 감안하면 그들의 신장세는 가히 눈부시다. 의약분업 이후 불과 1, 2년 사이에 2배 이상 급성장한 회사도 적지않다. 27개사로 구성된 이들 회사는 지난해 국내 의약품 시장의 18.4%를 차지했으며 내년에는 30%까지 급신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내 제약회사가 450여개나 되는 점을 감안하면 그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들이 한국시장에서 속된 말로 갈고리로 긁듯 돈을 챙길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그들의 전방위 로비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영업형태는 물론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우리의 의료시스템 자체가 그들의 폭리를 도와주는 측면도 적지 않은 것 같다.
먼저 정부의 약가 심의 과정부터가 문제다. 정부의 약가 원가분석시스템이 허술해 특허기간 내의 약은 물론이고 특허기간이 지난 약에 대해서도 적정가격과는 상관없이 이들이 제시하는 가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둘째, 그동안 정부가 내놓은 소위 약가인하정책이라는 것이 오히려 약가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한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1999년 복지부가 자신만만하게 내놓은 ‘의약품실거래가상환제’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정부의 보험약 고시가가 실제 거래가격보다 훨씬 높아 의사들의 배만 불린다며 실제거래 가격대로 보험급여를 지급한다는 게 이 제도의 요지였다. 그러나 이 제도 아래에서는 거래가격을 낮추면 제약회사나 의료종사자들 모두가 불리해지기 때문에 명목상의 거래는 항상 등재된 최고가격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어있다. 대신 제약사들은 자사제품을 처방하면 건당 10∼20%의 리베이트를 의사에게 전달하는 ‘처방전 리베이트’를 만들어 냈다.
정부의 어쭙잖은 정책 때문에 약값이 시장원리에 따라 결정되지 못하고 항상 최고가에서 거래되는 모순을 빚는 셈이다. 다국적사의 오리지널약품의 경우 외국에서는 특허기간이 지나면 카피품목이 쏟아져 나오면서 약값이 대폭 떨어지는데도 한국에서는 그 가격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저가약품 처방을 유도하기 위한 ‘성분명 처방제도’나 이 제도의 전제조건인 약효동등성 실험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제도를 시행하려면 시행주체인 정부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약효동등성 실험결과를 내놓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신뢰할 수 없는 약효 검증 과정을 통해 오리지널약품과 카피품목의 약효가 같다고 우기거나 동등성실험 비용을 카피품목을 생산하는 제약업체에서 부담해 그 결과를 제출하라고 하는 식이다. 피부학회의 원로인 아주대 의대 이성낙 교수는 “이는 정부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성조차도 망각한 처사”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잘못된 정책과 의료시스템이 이번 파문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청와대가 다국적 제약회사의 로비를 받아 장관을 교체했느냐의 여부가 쟁점인 이 사건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 장관은 다소 의욕이 앞서 복지부 공무원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고 개혁 의지가 너무 강해 현실을 무시하려 했다는 지적을 받고도 있다. 그러나 그는 역대 어느 장관보다도 건보 재정을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던 사람으로 불과 5개월 만에 전격 교체돼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동우 사회2부장 foru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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