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一. 四海는 하나가…(14)

  • 입력 2002년 7월 25일 16시 11분


때를 기다리는 사내들②

장량이 집으로 돌아가니 몇 년째 별채에 묵어온 주(周) 두식(斗食)이 의관을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두식(斗食)은 녹봉이 1백 석 이하인 진나라의 하급관리를 말한다. 주 두식은 한때 진나라에서 두식으로 일했으나 무슨 일인가로 사람을 죽이고 쫓겨다니는 주(周)씨 성의 사내였다. 갈 곳이 없다기에 장량이 받아 몇 해째 돌봐주고 있는데 겪어볼수록 알 수 없는 구석이 많았다.

주 두식에게서 먼저 별나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재주와 학식이었다. 누구든 그와 한 식경(食頃)만 얘기를 나누면 그가 두식이란 하찮은 벼슬과는 어울리지 않을만큼 총명하고 배운 게 많은 사람이란 것을 절로 느낄 수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어질고 너그러운 인품 또한 그랬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었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장량은 진작부터 주 두식이 전력(前歷)도 이름도 숨기고 있음을 짐작했다. 목숨을 의탁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도움을 받으면서 기어이 자신을 숨기는 것이 서운하기도 했지만, 반드시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장량 자신도 엄한 진나라의 관리와 치밀한 법망을 피해 숨어다닌 적이 있었을 뿐더러, 당장도 하비의 벗들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에게 자신의 참 이름과 핏줄을 속이고 있었다.

장량의 거실로 찾아온 주 두식은 어디 먼길이라도 떠날 사람 같은 차림이었다. 며칠 전 답답해서 세상이나 돌아본다고 나갔는데 돌아오자마자 떠날 채비라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거기다가 주 두식이 평소와 달리 이마가 방바닥에 닿도록 큰절부터 올리자 장량은 놀라기부터 먼저 했다. 장량보다 열살 가까이 나이가 많아 비록 신세를 지고 있어도 그렇게 자신을 낮추는 법은 없었다.

  <이문열 신작장편소설>
  호모엑세쿠탄스! 인터넷으로 연재하는 이문열 문학의 결정판! 지금 읽어보세요.

“아니, 주형. 갑자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장량이 얼결에 맞절로 받으며 묻자 주 두식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항(項)아무개 이제 떠날 날이 되어서야 지난 3년 대협(大俠)을 속인 죄를 청하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항 아무개가 누구이며, 도대체 주형께서는 무얼 저에게 속이셨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주 두식이 깊숙한 눈길로 장량을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장 대협(大俠)께서는 초나라 장수 항연(項燕)에 대해 들으신 바가 있으신지요?”

“들었다 뿐이겠습니까? 병사들에게는 덕장(德將)이요, 초나라로 보아서는 충신이며, 망국(亡國)의 살아남은 신하들에게는 그 해야할 바를 죽음으로 가르쳐준 분이시지요. 저는 일찍부터 항 장군을 스승처럼 우러르고 그 충의를 본받고자 애써 왔습니다!”

장량이 조금도 과장하는 기분없이 그렇게 받자, 주 두식이 갑자기 두 눈으로 주르르 눈물을 쏟아내며 말했다.

“그 분이 바로 이 항 아무개의 선친(先親)이외다. 내 이름은 전(纏)이라 하고 자(字)는 형제의 서열을 따라 백(伯)이라 하오.”

“원래 그러하셨구려…항백 대협.”

장량이 놀라움과 감격으로 그렇게 어물거리는데 항백이 소매로 눈물을 씻으며 이었다.

“선친께서 왕전(王剪〓초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 장수)의 핍박을 받아 전장에서 자결하셨다는 소식이 오자, 나와 아우 중(仲) 계(季)는 처음 깨끗이 선친의 뒤를 따르고자 하였소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헤아려보니 그게 아니었소. 범같은 장부들이 어찌 적과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스스로 목을 찌를 수가 있겠소? 생각 끝에 우리 삼형제는 가산(家産)을 흩어 장사들을 모으고, 병기를 마련한 뒤 칼을 짚고 일어났소. 그리고 먼저 진나라의 연횡책에 놀아나 망국을 불러들인 나라안의 매국노들부터 처단하기 시작했소.

처음 한동안은 하상(下相)에 있는 진나라의 개들을 죽여 기세를 올리다가 나중에는 함양에서 보내온 진나라의 군사와 관리들에게까지 맞서게 되었소이다. 그때 선친의 이름을 앞세웠기에 그분께서 아직 살아 계신다는 소문이 나오게까지 되었소. 하지만 더 많은 진병(秦兵)이 밀려들고 진나라의 관부(官府)가 초나라 땅에도 자리를 잡게 되면서 처지는 바뀌었소. 진병을 등에 업은 매국노들의 반격으로 가운데 아우[중]는 죽고 겨우 살아남은 막내[季]와 나는 서로의 생사도 모르는 채 흩어져 오히려 살인자로 쫓기는 몸이 됐소.

그리하여 고단하게 세상을 헤매다가 흘러 들어오게 된 곳이 바로 이곳 하비였소. 장 대협께서는 나를 거두어 보살펴 주셨으니 생명의 은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소. 은인에게는 진작부터 성과 이름이라도 바로 밝혀야 했으나 - 진나라의 법이 하도 엄하고 인심은 거칠어져 함부로 밝힐 수가 없었소. 또 그게 반드시 장 대협께 이로울 것 같지도 않아 하루하루 미루다가 이 자리까지 오고 말았소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하여…? 더군다나 의관까지 갖추시고….”

“실은 생사조차 모르고 헤어진 막내아우와 용케 살아남은 조카의 소식을 들었소. 막내아우 량(梁)은 어린 조카 적(籍)을 구해 이리저리 떠돌다가 멀리 오중(吳中)에서 자리를 잡았다 하오. 이제는 항량(項梁)이라면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알아줄 만큼 깊이 그곳에 뿌리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조카 적도 씩씩한 장부로 자라났다는 것이오. 특히 조카 적은 가운데 아우의 아들이자 이제는 우리 삼형제 모두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한점 혈육으로, 타고난 힘이 엄청날 뿐더러 무예까지 빼어났다고 했소. 자(字)를 우(羽)로 쓰며 벌써 나이 스물 둘인데, 오중의 소년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우러르고 따른다는 것이오.”

그제야 장량은 왜 항백이 그렇게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오중으로 떠나시려는 것입니까.”

“그렇소이다. 하지만 그리하려고 보니 진작부터 마음을 열고 대해 주신 대협을 속인 게 새삼 마음에 걸려 이렇게 그 잘못부터 빌고 있소이다.”

“그 일이라면 너무 마음에 걸려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실은 저도 항형(項兄)을 속여 온 셈이니 - 지금 형께서 알고 있는 저의 성과 이름 또한 참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원래….......”

장량이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을 열고 자신의 원래 성과 이름을 밝히려 했다. 그때 항백이 그걸 말리듯 황급히 장량의 말허리를 잘랐다.

“장 대협, 언제든 밝혀도 좋은 성과 이름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기껏 진나라의 개들이나 때려잡은 개백정 같은 우리와 진나라의 주인 여정(呂政)을 철퇴로 친 의사(義士)의 이름이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박랑사(博浪沙)의 의거는 지금이라도 진나라 관원들이 알면 핏발선 눈으로 뒤쫓을 만큼 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소이다. 그 크신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시오. 내가 듣고 마침내 감당해 내지 못할까 두렵소이다.”

“그렇게 추켜 말씀하시니 실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포악한 자를 치고 원수와 맞서는 일에 높고 낮으며 크고 작은 것이 따로 있겠습니까? 하지만 벌써 알고 계셨다고 하시니 참 이름을 숨긴 것은 서로 비긴 일로 하여 더 따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중으로 옮기시는 일은 또 깊이 헤아려 정하셨는지요?”

장량이 겸손하게 머리를 수그리며 그렇게 묻자 항백이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우 분께서 오중에 자리를 잡았다 하나 그곳 역시 객지입니다. 형제분이 함께 있어 힘을 합치는데 좋을 수도 있지만, 진나라 관부의 의심을 키울 수도 있으니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닌 듯합니다. 두 분 다 쫓기는 터라, 알아볼 사람도 배로 늘어나는 셈이니….”

“내가 이곳에서 장 대협과 함께 지낸다 해도 반드시 더 나은 일은 못될 듯 싶소이다. 장 대협 또한 관부의 의심을 사서 안되기는 저와 마찬가지이니, 내 아우의 처지와 무엇이 다르겠소? 더구나 이곳 하비는 하상과 너무 가까워 지난 몇 년 줄곧 마음 졸여 왔소이다. 언제 나를 알아보는 자가 나타나 나뿐만 아니라 장 대협까지 위태롭게 만들지 모르는 일이외다. ”

“그렇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이곳 하비에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아우도 장 대협 만큼은 오중을 주무르고 있는 것 같았소. 아무래도 우선은 그리로 가보는 것이 나을 듯하오.”

항백은 그 말에 이어 새삼 고마워하는 뜻을 드러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일러주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가 돌아다니다가 회음(淮陰)에 한(韓)나라 왕성(王姓)을 쓰는 괴짜가 하나 있다는 얘기를 들었소. 혹시 장 대협께서 찾고 계시는 이가 아닌가 해서….”

항백은 장량이 망해버린 한나라 왕실의 여러 공자들 중에서 횡양군(橫陽君) 한성(韓成)을 찾고있음을 알고 있었다. 횡양군 한성은 때가 와서 한나라를 다시 일으킬 때 임금으로 내세울 재목으로 장량이 첫 손 꼽고있는 왕족이었다. 아우를 수소문하다가 그 한성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람의 얘기를 들은 항백은 말머리를 바꿀 겸해서 슬며시 그 일을 꺼냈다.

장량이 과연 긴장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떤 사람입니까?”

“빈털터리로 저잣거리를 떠돌아다니기는 하지만, 성이 한씨(韓氏)이고 사람들에게 왕손(王孫)이라고 불린다 하였소.”

“한씨 성을 쓰는 이가 한 둘이며, 왕손이라고 불리는 이가 한 둘입니까? 요즘은 아무 젊은이나 좀 높여 불러야할 때는 모두 왕손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래도 키가 크고 생김이 훤한 데다 늘 긴 칼을 차고 다닌다고 하였소. 품행이 단정치 못하고 살아가는 수완도 없어 남에게 빌붙어 지내기는 해도, 그를 범상치 않게 보는 이들 또한 적지 않다 하였소.”

그 말에 장량은 은근히 마음이 끌리는 눈치였다. 더는 말을 돌리지 않고 항백에게 물었다.

“회음현(淮陰縣) 어디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습니까?”

“들은 대로라면 회음현 하향(下鄕) 마을로 가면 될 것 이외다. 그곳에 남창(南昌)이란 정(亭〓십리마다 하나씩 두었던 행정조직)이 있는데, 그 정장(亭長)이 그를 남다르게 여겨 거두어 주고 있다고 했소.”

항백은 그렇게 일러준 뒤 문득 작별을 서둘렀다. 그날 안으로 길을 떠나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동안 들인 정이 있어 장량은 차마 그대로 보낼 수 없었다. 항백의 옷깃을 잡고 하룻밤만 더 묵어가기를 청했다.

항백 또한 마음에 품고 있는 정은 장량에 못지않아서 잡는 손길을 박정하게 뿌리치지 못했다. 항백이 길 떠나기를 하루 미루자 장량은 곧 작은 잔치를 마련하게 했다. 따로 손님을 더 부르지는 않아 크고 떠들썩한 것은 아니어도 차림만은 정성을 다한 술자리였다.

글 이문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