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무슨 자격으로 통치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동서고금에 걸쳐 정치의 주요 쟁점이다. 가장 현명한 이가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군주제(서양)와 성군(聖君)정치(동양)이고, 어진 이가 통치의 주역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 현인정치(서양)와 신권(臣權)정치(동양)다. 책임 있는 정치 운영을 위해서는 부유한 이들이 실권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과두(寡頭)정치이고, 국민 다수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주권 재민의 원칙을 주장하는 것이 민주 정치다.
그런데 정체를 둘러싼 이런 개개 주장이 정치 현실에서 배타적으로 작동한 예는 없다. 일종의 혼합정의 양상이 현실이다. 군주정이니 민주정이니 하는 것은 명분이요 간판일 뿐이고 현실 정치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보편타당한 정체는 있을 수 없고 여러 상황과 구성원의 선호가 정체 결정의 핵심 요소다.
어쨌든 오늘은 민주정의 시대다. 다양한 정치양상에도 불구하고 모든 나라가 내거는 간판은 민주주의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른바 민주화의 홍역을 오랫동안 앓고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 토착화 논의는 시대적 화두가 됐고 이 책은 바로 이런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룬 것이다.
다섯 명의 필자인 강정인 안외순 전재호 박동천 이상익은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초반에 걸쳐 대학을 거친 학자들로 글 전반에는 이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의가 잘 나타나 있다. 책의 내용은 대략 3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제1장은 총론 성격의 것으로 ‘서구중심주의’라는 메타이데올로기와 관련해 주로 현대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총체적으로 분석한 글이다. 이 부분의 주요 주장은 국내외 학자들의 적절치 못한 견해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환멸이나 냉소에 빠지지 말고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3장과 제4장은 민주화의 구체적 내용에 관한 것이다. 3장은 제1공화국에서 제5공화국까지 민주화 운동의 주도세력과 시기별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것이고, 4장에서는 19세기 영국 민주화 과정을 참정권 확대를 둘러싼 선거법 개정을 중심으로 분석한 후 이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 가지 요소를 한국 민주화의 교훈으로 제시하고 있다.
끝으로 2장과 5장은 유교와 민주주의의 융합 가능성을 모색한 글이다. 한 나라의 정치질서는 오랫동안 축적된 문화와 구체적 삶의 산물이다. 전통문화를 뿌리째 뽑은 자리에 외래사조를 이식하겠다는 발상은 그래서 너무 안이하다. 탈전통과 전통활용의 논리가 우리의 민주화 논의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이유도, 유교와 민주주의를 동서사상 융합의 관점에서 모색하고 있는 이곳의 논의가 중요하고 참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의 민주화 논의를 보다 성숙하게 할 이 책은 전반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설득력이 있다. 좀더 욕심을 내자면,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는 거친 일반화보다는 지난날의 논의도 두루 살펴서 보다 포괄적인 연구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임효선(성균관대 교수·정치사상) doin95@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