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치열하게 살면 미워할 게 없죠” ´물보라´

  • 입력 2002년 7월 26일 17시 37분


[사진=김동주기자]
[사진=김동주기자]
◇물보라/한승원 지음/308쪽 8800원 문이당

새 장편소설 ‘물보라’를 낸 한승원(63)은 ‘작가의 말’을 이렇게 시작한다.

‘섬만 섬이 아니고 혼자 있는 것은 다 섬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관계맺은 것끼리 서로 갈등 대립하며 산다. 그때 각각 섬들이 된다.’

연도(蓮島)에 사는 ‘물보라’의 주인공인 소년 해선도 술만 마시면 그를 두들겨 패는 아버지도 섬이었다.

‘그들 부자는 한집에 살지만 각기 소라고둥처럼 외곬의 회랑 창자를 상대로 해서만 중얼거리고 사는 한 개씩의 섬이었다. 서로의 내부를 드나들거나 들여다볼 수 있는 창구를 틀어막아 버리고 벽을 쌓고 사는 외롭고 쓸쓸하고 슬픈 섬.’

해선과 가장 마음이 잘 맞는 친구는 그의 그림자다. 친구는 아버지가 가짜 아버지일지 모른다고 속닥거린다. 해선은 진짜 아버지를 끊임없이 찾는다. 해선에게는 낳아준 아버지도 길러준 아버지도 ‘진짜’가 아니다. 아버지는 해선의 속에 들어 있어, 그가 만들어 나갈 대상이 된다.

한승원은 “내 작품 세계는 이제 ‘휴머니즘에 대한 반성’으로 가득차 있다. ‘상생(相生)’과 ‘관계’가 그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우주적인 사랑’을 생각하면서 작품을 썼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작은 풀잎부터 인간까지 미워할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랑하는 눈으로 보면 미워할 것이 없어야 하지 않는가.”

생모와 생부를 만나 그들을 따라가면서, 해선은 그동안 빈 커피병에 키우던 지네를 밤나무밭에 풀어준다. 작가는 “이 세상에는 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모두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만난다는 것은 내 속의 우주와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우주가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인데, 그때 두 우주는 서로에게 자기 우주를 가르쳐 준다. 가르쳐 준다는 것은 길들이는 것이다.’

소년의 시선이 닿는 학교 운동장의 나무, 밤나무숲, 지네, 꽃에는 할머니가 가르쳐 준 또 다른 생태적이며 주술적인 세계가 숨어있다. 당골레인 할머니는 해선이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는 애정어린 관찰을 통해 작가가 그려낸 세밀화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것이 곧 소설쓰기다. 따라서 소설가의 우주읽기가 소설쓰기인 것이다. 내가 접하는 우주가 소설에 투영된다. 풀잎파리 하나에 관심을 갖는 것도 소설쓰기로 승화된다.”

작가의 장흥 집 앞에서 갖가지의 모습으로 넘실대는 바다와 어느날 밤, 느닷없이 나타나 팔을 물어버린 지네, 한켠에서 수줍은 듯 고개를 내민 작은 꽃도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꽃의 숨결이 느껴진다. 꽃이 피면 반드시 코를 대고 향기를 맡아 본다. 뒷산의 춘란향은 독할 정도로 여성적인 향이다. 그런 향에 코와 귀 눈이 열린다.”

‘물보라’에는 꽃이 등장하는 장면이 유독 많다.

작가는 몇 번이고 “치열하게, 열심히 사는 삶”을 강조했다.

“생물학적 생명과 작가적 생명은 유기적으로 서로 두 바퀴가 돼야 한다. 나는 살아있는 한 소설을 쓸 것이고, 모든 것은 치열한 작품 쓰기에 집중된다. 죽는 날까지 치열하게 쓰고, 우주를 탐색해야 한다. 나를 바꿔가고, 작품을 쓸 때마다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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