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왜 나는 너를…', 사랑에는 중간이 없어!

  • 입력 2002년 7월 26일 17시 55분


만남‥행복‥ 프랑스 영화 '남과 여'
만남‥행복‥ 프랑스 영화 '남과 여'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지음 / 정영목 옮김 / 288쪽 8500원 청미래

20대 후반의 나는 어느 날 항공기 좌석 옆자리에 앉았던 그래픽 디자이너 ‘클로이’와 만난다. 헤어진 후 내가 전화해 다시 만난 자리에서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그녀 말을 듣고 무리하게 먹고 탈이 난다. 그런 자신이 창피해 열정을 접으려는 직전, 두 번째 만남에서 뜻밖에 그녀가 내게 입맞춤한다.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 진다. 동거도 시작한다. 하지만, 상처주는 일도 많아진다. 아침상에 좋아하는 잼이 없다고 타박을 하고 그녀의 구두에 악평을 했다가 크게 싸운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파티에서 동료 ‘윌’을 그녀에게 소개한다. 그녀는 윌에게 호감을 보인다. 나는 서운함과 질투를 느낀다. 그녀가 외박을 한 날, ‘여자 친구 집에서 잤다’고 둘러 대는 말이 석연치 않게 느껴진다.

이제, 그녀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이별‥고독‥

파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녀는 윌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마침내 울면서 고백한다. 나는 절망의 수렁에 빠진다. 오직 ‘자살’만이 두 사람을 죄책감의 고통에 빠지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시도하지만 두사람만 좋은 일 시킬 것 같아 관둔다.

시간이 흘러 이제 나는 그녀의 부재를 받아 들인다.

그리고 얼마 뒤, 새로운 여자 레이철을 만난다. 그녀의 저녁 초대에 응하면서 나는 또 다른 사랑의 과정을 반복하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이 책은 현재 서른 셋의 젊은 철학자 알랭 드 보통(런던대 철학강사)이 20대 후반에 실제 겪었던 사랑 이야기다. 그러나 흔해 빠진 사랑 타령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책은 줄거리로 읽는 책이 아니다.

저자는 연애를 하면서 한 사내가 여자를 만나 절정의 한 때를 보냈으나 결국 소멸을 바라보는 심경을 집도의가 수술을 하듯 냉정하고 선명하게 그리고 있다.

그는 사랑을 하면서도 철학자 답게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것인지,네가 너무 많은 것인지’ 끝임없이 회의하고 질문한다.

두 사람의 만남, 구애, 사랑, 헤어짐을 이루는 디테일들도 멋지지만 그것들을 잇는 사랑과 삶에 관한 철학적 명상들이 수두룩하다. 알랭 드 보통이 이 처녀작을 통해 ‘철학을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내린 거장’(다소 과장돼 보이는)이란 평을 들었다는 것이 실감난다.

그는 그녀와 운명적 사랑을 경험하면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자신의 ‘이성과 합리’에 당혹스러워 한다.

‘끊임없이 솟아 오르는 그리움을 해소해 줄 존재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은 용서받을 수 없을까? 한번만이라도 이성의 검열에서 벗어나 그 만남이 우리의 낭만적 운명에서 정해진 필연적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나는 미신적인 사람은 절대 아니었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너무 잘 맞는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무수한 사실들 앞에 새로운 종교라도 세우고 싶은 심정이 된다.’

이제 그녀의 모든 말과 행동은 그에게 모두 기호가 된다. 그의 모든 생각들은 ‘그녀가 나를 바라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이 한가지로 환원된다.

마치 사냥꾼처럼 탐정처럼 낭만적 편집증 환자가 된 그는 자신 안에 들어있는 욕망과 어느 때보다 스릴 넘치는 게이머(gamer)로서의 전율을 함께 느낀다.

섹스 경험은 ‘행동 이전에 생각이 먼저’였던 그를 당혹스럽게 한다.

‘섹스는 육체의 산물이다. 무분별이며 직접적이며 이성의 굴레로부터 해방이며 희열을 동반한 육체적 욕망의 해소이다. 그녀와 첫 키스했을 때 내 관심은 키스 자체가 아니라 키스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깨달았다.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에 대해 생각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사랑을 한다. 침실에서는 모든 평가적 판단을 흔적도 없이 없애 버려야 한다.’

이런 불타던 마음도 막상 그녀가 자신에 대한 사랑이 확고해짐을 깨닫자 조금씩 차가워지고 냉정해진다. 그는 그런 자신에 대해 회의하고 자학한다.

‘사랑은 왜 변하는 것일까. 추하고 멍청하고 따분한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아름답고 똑똑하고 재치있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 사랑을 하는데 그런 완벽한 존재가 어느날 갑자기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니…. 어떻게 나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면 그녀의 생각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여튼 남자들이란….^^)

어느덧, 사랑에 빠졌을 땐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모습들이 이제 단점과 지겨움으로 다가오면서 그는 ‘머릿 속에서 공상한 놀라운 심포니를 실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소리로 들었을 때의 실망감과 같다’고 표현한다. 의식 속을 떠 다니던 천사같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이제 지상으로 내려와 그들이 어떤 종류의 칫솔을 쓰는 지, 어떤 방법으로 발톱을 깎는지 알게되며 바흐보다 베토벤을 좋아하고 만년필보다 연필을 좋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마침내 그는 사랑 그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하게 된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나 자신이 사랑을 한다고 믿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특정한 문화적 시기, 어디에서나 감상적인 마음을 찾아내 숭배하는 문화적 시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의 동기가 된 요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사회가 아니었을까? 다른 문화와 시대에서라면 내가 그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무시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을까.’

그는 이어, 새 애인이 생겼음에 미안해 하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여유까지 생긴다.

‘사랑을 선과 동일시하고 무관심을 악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그녀가 내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내가 그녀에게 사랑을 ‘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먼저 그녀를 사랑했다. 그것에는 나를 위한 이기적인 동기가 있었다. 따라서, 그녀도 똑같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관계를 끝낼 수 있다. 사랑의 종말은 이타주의 이기주의, 도덕성과 비도덕성사이의 충돌이라기보다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두 충동 사이의 충돌이다.’

마침내, 그녀와 헤어지고 몇 달이 흐른다. 그는 그녀의 부재가 아니라 부재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자신을 보고 놀란다. 그러면서 앞으로 삶에서 지나친 의욕이나 고통, 씁쓸한 실망감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도록 사랑을 통해 어떤 지혜를 배워야 하고 또한 배웠음을 느낀다.

알랭 드 보통의 경험은 만남 절정 권태 헤어짐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건 바로 내 이야기야’하는 공감과 ‘아 당신도 그랬었군요’하는 위안을 함께 받게 된다. 처음 경험하는 낭만적 사랑앞에 신열을 앓고 있는 젊은 연인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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