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세상을 바꾸다▼
벌써 먼 추억의 희미한 단편처럼 여겨지지만 불과 이틀 모자라는 한 달전의 일이다. 그 때 우리는 두 부류의 영웅을 보았다. 한쪽은 국민적 열광 속에 월드컵 경기장에서 태어난 축구 영웅들이었고 다른 한쪽은 국민이 눈물로 보낸 서해교전의 영웅들이다. 태극 전사들이 월드컵 4강의 신화로 국민에게 영광을 바친 그 시간 전쟁영웅들은 나라를 지킨 명예를 국민의 가슴에 심고 떠나갔다.
그 즈음 축구 승리를 경축하는 잔치는 광화문 한복판에서 김대중 대통령까지 참석하는 성황 속에 밤하늘의 불꽃으로 장식됐지만 하루 전 순국 영웅들을 보내는 합동영결식은 출입통제 지역인 국군병원에서 대통령과 국방장관도 없이 유족들의 흐느낌 속에 치러졌다. 김 대통령은 우리 선수들이 뛰는 거의 모든 경기를 찾아 선수들을 응원했지만 일본 방문길의 대통령은 서울공항에서 헬기로 5분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 분당 국군수도병원 영안실의 용사들은 찾지 않았다.
축구 영웅들은 경기가 끝난 후 3억원씩 포상금을 받았지만 순국 영웅들은 교통사고 환자에게 지급되는 정도인 평균 3000만원의 ‘조의금’을 받았을 뿐이다. 월드컵 전사들의 활약상은 경기가 끝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방송에서 반복 재생되어 모든 경기 장면을 외울 정도지만 참수리357호 영웅들은 ‘우리 어선이 원인 제공을 한 우발적 사건’이라는 일부 언론의 해괴한 논쟁에 끌려다니다가 국민의 감각에서 잊혀졌다.
축구 영웅들에 대한 국민의 열광에 찬물을 끼얹자는 얘기가 아니다. 전사 장병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비교해 보았을 뿐이다. 그렇게 정부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던 해군 영웅들은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소중한 결실을 안겨주고 있다. 예컨대 그들의 희생은 서해 방위를 강화하고 군 전략에서 정치논리를 배제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불만스럽긴 하지만 북한이 ‘유감’을 말하며 다시 한번 화해의 자리에 앉겠다는 것도 (속뜻은 다른 데 있을지라도) 그들의 큰 희생이 바탕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해군 장병들의 희생 이후 이 시대 ‘햇볕정책 신봉자들’이 마침내 국민의 마음을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가 “햇볕정책의 시행 과정에 문제가 있고 한계에 봉착한 것 같다”고 한 말이 그것이다. 서해사태가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을 들끓게 함으로써 노 후보가 ‘이 분위기를 수용하지 않고는 대선은 치르나 마나’라고 판단해 이처럼 극적으로 자세를 전환했다면 해군 영웅들의 희생은 얼마나 값진 것인가.
남북화해와 교류협력 같은, 이른바 햇볕정책의 기본정신이나 다소간의 성과까지 국민이 다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북한은 변하지 않는데, 심지어 우리 영해에서 병사들까지 죽일 정도인데 초지일관 진행되는 DJ정권의 짝사랑식 햇볕정책은 싫다는 것뿐이다. 그동안 바로 그런 비판에 대해 가장 예민하고 강력하게 반발해 온 여권의 대통령후보가 민심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을 들으니 이들의 희생이 고마울 뿐이다.
▼보수-진보 갈등해소 계기를▼
앞으로 모든 국민이 지켜보겠지만 노 후보가 그의 새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추종자들을 설득할 때 우리 사회의 큰 갈등거리인 햇볕정책이 상호주의 원칙과 국민적 동의 속에 진행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것이 대선 승리를 위한 정략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상관없다. 김칫국부터 마시는 일일지 모르지만 노 후보의 ‘변신’이 이 땅의 골칫거리인 보수와 진보간의 치열한 갈등을 해소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이 정권 들어 갈가리 찢긴 사회가 하나되어 화합하는 것도 기대해 볼 만하다. 청와대와 민주당이 공식적으로는 아직도 딴소리를 하고 있어 국민 화합이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작은 희망의 불씨는 하나 발견한 느낌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일군 성과는 놀랍다. 해군 전사 장병들은 죽어서도 이렇게 나라를 지키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관계없이 이들의 죽음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고 국민의 마음 속에 그들을 영원히 기리도록 하는 정권이 들어서기를 기대한다. 영웅들이 있기에 대한민국 해군이 지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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