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이 ‘대∼한민국’을 외치며 벌인 거리의 축제를 마감하면서 우리는 마치 선진국에 진입한 듯 고단위 환각제에 도취돼 소란을 떨었다. 그것도 임시공휴일을 포함하여 연 이틀씩이나. 48년 동안 쌓인 국민의 한을 푼 ‘푸닥거리’라고 하니 나름대로 의미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5일 근무제가 일부 시행되면서 덤으로 쉬는 날이 생겼다. 이 또한 우리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문턱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헌절, 국가원수는 어디에▼
그러나 공휴일에도 엄연한 등급이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뜻 깊이 되새겨야 할 7월의 휴일은 모든 휴일의 심장에 자리한 대한민국의 탄생일이다.
단순한 ‘날’이 아니라 ‘절(節)’이라는 위용이 주어진 국경일의 하나인 제헌절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나라의 근본이자 민족의 명운이다. “비구름 바람 거느리고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적…. 삼천만 한결같이 지킬 언약 이루니 옛길에 새 걸음으로 발맞추리라. 이 날은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 위당 정인보 선생의 붓을 빌려 빚은 장엄한 가사에 실린 제헌절 노래를 한 소절만이라도 기억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몇 명이나 될지.
17일 아침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제헌절 기념식은 실로 대한민국 생일의 서글픈 현주소를 보여주는 행사였다.
식장이 초라해서가 아니었다. 격식을 못 갖췄어도 아니었다. 나라의 근본법에 대한 예의가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역대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정당 지도자, 시민·사회단체 대표 등 참석자의 구색은 대체로 갖추어진 셈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곳에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고…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헌법(69조) 앞에 선서한 바로 그 사람,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비록 그렇게 선서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은 헌법 위에 군림하는 존재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까. 그래서 ‘대권’이니 ‘통치권’이니 하는 시대착오적 언어가 난무하고, 그래서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꾸자는 개헌 논의를 들고 나오고 있는 것인가.
대통령 대신 경축사를 읽을 ‘대독(代讀) 총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직 헌법이 요구하는 국회의 동의를 얻지 못한 ‘서리’에 불과해서 그랬는가.
명색이 국경일인데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외교사절도 한 사람 없었다. 세계인의 보편적 신념이라는 입헌주의를 세운 ‘헌법의 날’에 왜 외교사절을 초대하지 않느냐는 어느 대사의 질문이 민망스럽다.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으니까 그런 것일까.
단상의 지정석은 그렇다 치고 단하의 풍경을 보자. 외유를 떠나지 못한 20명 남짓한 한가로운 국회의원이 어색한 웃음을 인주 삼아 눈도장을 찍었을 뿐 행정부의 몫으로 배정된 자리에는 장관 한 사람 보이지 않는다. 동원된 청소년들이 자리를 메웠다.
국회의장의 경축사는 ‘헌정 사상 최초로 국회의 자율적인 투표로 선출된’ 국회의장이라는 자부심으로 번뜩인다. ‘주권자인 국민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대통령을 뽑았고 또 그를 감시하기 위해 국회를 구성했다.’
▼헌법 존중하는 대통령 보고싶다▼
그의 헌법이론의 원론적 당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석연치 않은 여운이 남는다. 과연 그의 과녁은 헌법일까, 대통령일까.
마지막 생존자 제헌의원의 간곡한 기념사는 ‘옛길에 새 걸음으로 발 맞춰’가는 개헌의 기본원리를 부연 설명했다. “한 나라의 기본법을 고치는 것은 시대와 역사의 진전, 그리고 국리와 민복을 위해 민의에 따라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휴일로 흘려버린 7월을 아주 보내기 전에 다시 한번 자신에게 되물어보자.
우리에게 헌법은 무엇인가. 6월 한달 동안 그처럼 목이 터져라 외치던 ‘대∼한민국’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는 눈을 부릅뜨고 챙겨보자.
연말에 새로 뽑을 국가원수가 내년 제헌절 식장에 나타나는지를. 헌법에 대고 선서하고 취임할 그가 재임 중에 헌법을 얼마나 깊이 생각하는지를.
안경환 서울대 법대 학장·한국헌법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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