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에게 인격이 있듯이 정책에도 품격이 있다. 하다못해 돈을 주고 사는 상품에도 품격이 있어서 요즈음에 ‘명품’을 구하려는 호사가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는 사람을 보면 그의 인격이 의심스럽다. 인격은 바로 언행이다. 자기가 하는 말을 중히 여기고 한번 약속한 내용을 지키려는 사람에게 높은 인격을 인정한다. 한마디로 믿을 만한 사람이다.
▼장관따라 정책 왔다갔다▼
정책의 품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에서 한번 발표된 정책은 가능한 한 지켜져야 한다. 정책은 한마디로 정부의 약속이다. 그러나 정책은 개인이 만드는 약속이 아니라 정부의 공적 약속이다. 정부에서 일하는 개인이, 예컨대 장관이 바뀌었다 할지라도 공적 약속은 정부의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싫어할지라도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최근 크게 보도된 ‘장관 따라 춤추는 정책’은 바로 정책의 품격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문화관광부의 ‘태권도공원’ 건설에 대한 정책이나 산업자원부의 ‘울산공업역사박물관’ 건설 정책은 정부의 약속이 유야무야된 사례다. 사실 대한민국의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발표된 정책이 용두사미가 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4년 열린 만국우편연합(UPU) 서울총회에서 한국 우정사업을 97년에는 공사(公社)로 전환시킬 것이라고 발표한 국제적 약속마저 무시된 적도 있다.
원래 정책이란 시의를 반영하는 것이어서 경우에 따라 정책방향이 변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발표된 정책은 그 자체가 하나의 약속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변화시키려면 정당성을 국민에게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책의 품격이다. 약속은 만들기도 신중해야 하지만, 그것을 지키지 못할 때에는 그에 상응하는 설명과 사과를 함께 해야 한다.
정부의 정책은 개인의 약속과는 달리 수많은 사람들이 결정에 관여하기 때문에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아주 어렵다. 그래서 앞서가는 국가들은 정책의 품격을 지키려는 노력을 절차적 합리성으로 조성하고 있다. 우선 공직을 담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특정 정책에 대해 동일한 발상을 지닐 수 없다. 그들이 자신의 발상을 각자 말한다면, 보통사람들이 듣기에는 그것이 국가의 약속인 정책으로 착각하여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책 발표의 창구를 단일화한다.
행여 어느 장관이 어떤 정책에 대한 발상을 입에 담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발상이고 검토 중이거나 심의 중인 정책방향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한다. 정책 창구를 통해 발표되지 않은 정책은 아직 검토 중인 것이지 정부의 약속으로 인정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정책은 아주 복잡하기 때문에 개별 부처 수준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거의 없고 여러 부처간 사전 조율이 필수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정협의라는 아주 훌륭한 정책결정 절차도 있다. 정책이 최종적으로 확정되려면 일정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물론 그 절차란 정책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조율하며, 때로는 논의와 심의가 격렬하여 갈등으로 비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을 얻기 위한 민주적 과정이다.
▼정교한 절차-합리성 절실▼
이제 우리 정부도 정책의 품격을 위해 한편으로 절차적 합리성을 증진하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그것은 문화국가의 척도다. 다른 한편으로 일반 국민이 혼란을 겪지 않도록 정책사안을 해설하고 이해시키는 노력을 늘려야 할 것이다. 아직도 많은 국민이 검토 중인 정책방향을 마치 확정된 것으로 착각하고 미리 김칫국부터 마시는 경우가 허다한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스스로 떳떳하고 당당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행을 하는 개인이 있다면 높은 인격을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정부도 정책의 품격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절차적 합리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정책의 품격을 위한 절차는 정교함과 단아함이 배어 있는 예술과 같은 것이다.
김영평 고려대 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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