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현지 군부대의 ‘의도적 도발’임은 분명하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 북한 최고지도부의 의도가 개입된 것은 아닌 것 같다는 게 잠정적 추정이다. 북한당국이 전례 없이 신속하게 ‘사실상 사과’를 해 왔고 대화재개 의사까지 밝힌 만큼 수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북한의 유감 표명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하루 사이에 ‘적극 수용’에서 ‘신중 대처’로 풍향 변화를 보인 데 대한 정부 관계자들의 말을 살을 붙여 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된다.
“북한이 유감 표명을 해왔다는 보고를 받고 김대중 대통령은 ‘신중한 대응’을 지시했으나, 통일부 관계자들이 ‘정치적 판단력’이 부족해 다소 앞서 나갔다.”
복잡다단한 경위를 줄이고 줄거리만 추려 놓은 이 요약본을 읽고 나면 누구라도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울 것 같다.
우선 굳이 ‘음모론’에 기울지 않은 사람이라도 북측과의 접촉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남쪽과 관계된 일은 아주 작은 사안이라도 치밀한 전략 전술 아래 행한다는 점을 금방 알게 된다.
90년대 남북국회회담에 참여했던 박관용 국회의장도 최근 사석에서 “북측과의 협상 도중 ‘국회의 권능’에 대한 얘기가 화제가 되자 북측 대표가 우리의 국회법 규정을 줄줄이 외우며 논박을 하는 것을 보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이런 점에서 서해교전이 ‘우발적’ 사건이란 북측 주장이나 ‘최고지도부와는 무관한 사건’이란 우리 정부의 ‘잠정적 결론’을 들으면서 69년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사건에 대한 고 김일성 주석의 해명과 너무도 논리구조가 비슷하다고 느꼈다면 지나친 의심일까. 김 주석은 72년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이 사건에 대해 “좌익맹동분자들이 한 짓이지 내 의사나 당의 의사가 아니었다”고 설명하며 유감을 표명했다.
백보 양보해 서해교전이 ‘북한지도부와 무관한 사건’이라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이 남는다.
“일방적 포격으로 무고한 장병 5명이 숨지고, 배 한 척이 침몰됐는데 우리가 얻은 것은 책임소재가 애매한 한마디의 말이냐”는 항변이 나올 경우 설득하기가 마땅치 않을 것이란 점이다.
통일부 관계자들의 ‘정치적 판단 부족’ 때문에 북측의 전화통지문이 오자마자 ‘적극 수용’이란 입장발표가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실제 그동안 정부 내에서 북측의 유감 표명을 고대했던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북한과의 대화재개가 절실하다면 그럴수록 왜 좀 더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하는 노력과 정지작업을 기울이지 않고, 매양 정부 혼자 ‘나 홀로 과속 드라이브’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띄는가 하는 점이다.
6·15 정상회담 때만 해도 현 정부는 야당이나 언론에 사전 설명을 하고 이해를 구하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햇볕정책’의 원조격인 ‘동방정책’을 추진하면서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당시 야당이던 기민당에 극비사항까지도 알려주고 협조와 이해를 구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넓혔던 전례가 상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북문제는 항상 국민적 공감대를 얻어가면서 유리그릇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다루어야만 역풍을 피할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현 정권의 되풀이되는 대북정책 ‘과속 드라이브’를 보면서 결국 ‘대북문제만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는 일’이란 독식 의식의 발로인 것 같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이동관 정치부차장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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