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86…밀양강 (2)

  • 입력 2002년 7월 31일 18시 26분


저녁을 먹은 후에는 집을 빠져 나오기가 어려워 남자가 여자의 집을 찾는 것은 아침을 먹은 후나 점심을 먹고 난 다음이었다. 장이 서는 날에는 점원을 몇 명 고용해야 할 정도로 바빴지만, 담배를 사러 나가는 척 하면서 가게를 빠져 나왔다. 하루라도 당신 얼굴 안 보면 못 살 것 같아예 오 분이라도 좋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오 분이면 시간을 낼 수 있지예 하루에 단 오분이라예 다른 건 아무 것도 안 바랄게예 당신 약속해 주이소. 남자는 여자와의 약속을 지켰다. 어제도, 엊그제도, 그 전 날도, 아내가 진통으로 한참 힘들어하고 있을 때도 여자의 집을 찾았다.

여자는 사흘 전의 정사를 떠올리고 윗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갓을 벗더니 한 손으로 저고리 고름을 풀고 다른 한 손으로 치마를 걷어올렸다. 몸이 위로, 위로 흔들리고, 흔들리고 있는 건지 흔들고 있는 건지 모를 정도가 됐을 때, 남자가 여자의 몸에서 몸을 떼었다.

여자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 남자의 목덜미에 손가락을 펴고, 소리내지 않고 물었다. 왜 내 얼굴을 안 보는 거라예 오늘은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어예 무슨 일 있어예? 남자는 대답 대신 여자의 머리칼을 귀 뒤로 밀어 넘기고, 벌렁 몸을 내던졌다.

여자는 남자의 몸에 몸을 포개고 입술에 입술을 갖다대면서 말이 떠오르기를 기다렸지만, 남자는 그저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배꼽에 고인 땀을 혀로 핥았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여자의 입이 아래로 옮겨가는데도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의 팔 위에 머리카락을 펼치고 누웠다. 남자의 아내가 산달이 되었다는 소문은 들은 지가 오래다. 여느 때는 내일의 약속이 포함된 부드러운 침묵인데, 오늘의 침묵은 초조함으로 굳어 있었다. 이 사람, 아내의 출산에 맞춰 가지 못할까봐 겁을 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내일은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내일 안 온다면 두 번 다시 안 온다는 뜻이다. 여자의 머리로 피가 솟구치고, 귀와 눈으로도 피가 밀려 올라와, 남자의 옆얼굴이 새빨갛게 보였다.

여자는 온 동네가 잠에 빠진 깊은 밤에 남자의 집을 찾았다. 문에 내 걸린 금줄에 끼여 있는 빨간 고추를 보는 순간, 여자의 마음은 달걀처럼 깨져버렸다. 이제 그 넓은 등도, 건장한 어깨도, 부드러운 가슴팍도, 거칠거칠 짧은 손가락도, 납작한 손톱도, 좀처럼 웃지 않는 입술도 내 것이 될 수 없다. 그 사람과 지낼 수 없다는 사실이 물처럼 분명해졌다.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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