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제3 후보’ 정몽준

  • 입력 2002년 8월 2일 18시 37분


월드컵 4강 신화(神話)의 최대 수혜자가 정몽준(鄭夢準)씨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거스 히딩크 감독과 태극전사들이 얻은 명예와 부(富)도 정씨의 ‘정치적 수혜’에는 견줄 것이 못된다.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이자 대한축구협회회장이고 국회의원이자 현대중공업 고문이고 울산대 이사장이기도 한 그는 이제 명함에서 너무 많은 직함들을 지워버려도 될 것 같다. 대신 굵직한 고딕체로 ‘제3 후보’라고 적어넣으면 그만이다. 얼마 전 한 여론조사에서 정씨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에 이어 지지도 2위를 기록했다. 오차 범위라고는 하지만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를 앞질렀으니 ‘제3 후보’ 명함을 내놓은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슬로 사커’와 ‘몸값’▼

그는 아직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몸값’이 오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그는 당장 ‘압박축구’를 할 필요는 없다. ‘슬로 사커(slow soccer)’를 즐기면 된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후보로 출마할 경우 “가능하다면 후보 때부터 초당적으로 갈 생각”이라고 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당을 창당하려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고도 했다. ‘그들(기존 정당과 정치인)만의 리그’에 애면글면 끼어들기는 싫다, 무소속 대통령도 좋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괜찮은 정치 세력이 출현한다면 거기에 참여할 용의가 있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빠뜨리지 않았다지만 말의 무게는 당연히 뒤쪽에 실려 있다. 유명 구단에 축구 스타가 몰리는 거나 힘있는 정치세력의 지원을 받는 후보가 선거에 유리한 것은 정한 이치다.

아무튼 8·8 재·보선이 끝나면 그의 ‘몸값’은 치솟을 것이다. 후보교체론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는 민주당의 상당수 대의원들은 벌써부터 정씨를 노 후보의 대안으로 손꼽고 있다. 재집권을 할 수 있다면 검은 고양이면 어떻고 흰 고양이면 어떻느냐는 세력 역시 ‘정몽준 카드’를 저울질한다.

물론 변수는 존재한다. 다음 주 재·보선에서 민주당이 수도권에서 선전한다면 지금의 흐름이 일거에 반전될 수 있다. 흐름이 바뀌면 ‘정몽준 몸값’도 하락할 것이다. 그러나 반전의 조짐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민주당은 이미 패배를 기정사실화한 듯 싶고 비주류측은 아예 ‘예정된 패배’를 즐기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그도 그럴 것이 도대체 민주당이 표를 얻을 만한 싹수가 보이지 않는다. 6·13 지방선거에서 나타났듯이 다수 유권자들은 한나라당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민주당이 싫어 한나라당 후보를 찍는다. 그들에게 민주당은 여전히 DJ당이고 DJ 하면 아들들 비리가 떠오르니 인물이야 어떻든 민주당 후보라면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당이 ‘DJ 수렁’에 빠진 격인데 고약한 것은 그 수렁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해교전에서 마늘 파동, 개각과 ‘장상(張裳) 파문’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그나마 기댈만 하던 노풍(盧風)도 되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당은 거의 수습 불능의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졌다.

‘제3 후보 정몽준’에게는 깔아준 멍석인 셈이다. 그는 “늦어도 9월 중순까지는 (대선출마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9월 중순이면 ‘노무현 신당’이 생기든 ‘민주당 비주류+자민련+민국당+미래연합 당’이 생기든 새로운 구도가 얼추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제3 후보 정몽준’으로서는 새 판이 짜여질 때까지 몸 관리를 하면서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대안’만으로는 안된다▼

그렇다고 정씨가 마냥 여유를 보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정치인의 인기란 요즘 인기가요 순위보다도 빨리 변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가 ‘대선 그라운드’에서 뛰기로 작정하는 순간부터 ‘네거티브의 검증대’에 올라서야 한다. 그는 세상이 다 아는 재벌가의 아들이다. 부친인 고(故) 정주영(鄭周永) 회장은 ‘(돈은) 주면서도 (권력에) 치이는 것’에 반발해 92년 대선에 직접 나섰다가 실패했다. 그러나 정 회장은 DJ의 아들에게도 뒷돈을 주었다. ‘그의 방식’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씨는 그런 ‘아버지의 유산’도 끌어안고 가야할지 모른다. 현대는 그에게 큰 힘이 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가볍지 않은 부담이 될 것이다.

‘제3 후보 정몽준’이 또다른 신화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자신을 국민에게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도 싫고 누구도 싫어 눈길을 주는 대안으로서가 아닌 ‘정치지도자 정몽준’의 비전을 국민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이제 막 신발끈을 조이는 선수일 뿐이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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