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아직 살색이 한 가지뿐이다. 크레파스나 수채물감에 ‘살색’으로 이름 붙은 바로 그 색깔이다. 기술표준원이 1967년 한국산업규격을 정하면서 일본의 색깔 이름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 살색이다. 당시만 해도 외국사람 만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니 그랬다고 치자. 세계가 일일생활권이고 입만 열면 국제화를 외치는 요즘도 살색이 한 가지뿐이라니…. 일본은 이미 4년 전 살색을 엷은 오렌지색을 뜻하는 ‘페일 오렌지’로 바꿨다. 그런데도 우리는 35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고, 어린이들은 사람을 그릴 때 얼굴에는 으레 살색 물감을 골라 칠한다.
▷살색에 대한 고정관념은 피부색이 다른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키운다. 검은 피부의 혼혈아들이 왕따를 당하는 게 그렇고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들이 차별대우를 받는 게 또 그렇다. 우리의 살색만이 사람의 피부색깔이라면 나머지 사람들은 뭐란 말인가. 얼마 전 TV에 나온 한 외국인 근로자의 말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지하철에서 한 아이가 “저 아저씨는 왜 얼굴이 시커매?”하고 묻자 엄마가 “너무 안 씻어서 그렇단다”고 답하더라는 얘기다. 피부색은 단지 멜라닌색소가 많으냐 적으냐의 차이일 뿐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크레파스와 수채물감의 특정색을 살색으로 이름지은 것은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에 대한 침해’라며 기술표준원에 이름을 바꾸라고 권유했다. 살색을 대신할 이름으로는 복숭아색 살구색 등이 거론되고 있다는 얘기다. 늦었지만 잘된 일이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이번 조치가 검은 피부에 대한 멸시뿐만 아니라 흰 피부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도 없애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살갗을 하얗게 만든다며 값비싼 미백화장품을 사 바르고, 그것도 모자라 피부를 벗겨내는 박피술까지 마다하지 않는 세상이 아닌가.
최화경 논설위원 bbchoi@donga.com
구독
구독
구독